작성일 2016.11.24 조회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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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동 지명유래
작성자 학성동
[위치]
학성 1동은 시청에서 서북방으로 0.15km 떨어져 있다. 법원·검찰청·MBC 문화방송국 등이 소재하고 원주역 앞 인근 야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학성 2동, 북쪽으로는 단계동과 우산동, 남쪽 방향으로는 일산동이 접해 있다. 학성 2동은 시청에서 동북방으로 3.3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주역 앞 상가와 원일로·평원로변 및 정지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이며, 학성 1동·중앙평원동·태장 1·2동과 경계를 이루며 전철을 중심으로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정지마을)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쪽에는 봉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유래]
학성동(鶴城洞)은 조선시대에 원주의 옛 이름인 학성현(鶴城縣)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외에 특별한 유래는 찾을 수 없다.


[연혁]
원래 원주군 본부면 지역으로 원주읍 아래쪽이 되므로 하동리(下洞里)라 하였다. 1937년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함으로써 영정(榮町)이라 하다가 1945년 정(町)을 동(洞)으로 개정하여 학성1, 2동이라 하였다. 1955년 원주시 승격으로 학성 1동이 설치되었다가 1961년 연합동제 실시로 학성 1·2동을 학성동으로 연합하였고, 1987년 인구증가로 학성동을 다시 학성 1동·학성 2동으로 나누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0년 우산동 일부지역을 학성 1동으로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다.


[지명]

갈머리 [마을]
[위치] 현재 시청에서 연세대 원주의대에 걸친 언덕부근의 마을이다. 갈두라고도 한다.
[유래] 마을이 갈라진 머리부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진골 [마을]
[위치] 사직당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일산초등학교와 북원초등학교 사이의 마을이다. 동짓골·동진동이라고도 한다.
[유래1] 예전에 동지(同知)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동진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래2] 또한 건장한 남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를 모르는 채 평생을 농사일만 하다 죽었다 하여 ‘동(童)’자에 ‘진(眞)’자를 사용하여 동진골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땀띠물 [샘]
[위치] 청산골 서쪽에 있는 우물을 말한다. 청산물이라고도 한다.
[유래] 물이 몹시 차서 목욕을 하면 땀띠가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매화촌(梅花村) [마을]
[위치] 유문 옆에 있는 마을로 법원과 검찰청 밑에 있다.
[유래] 유문옆에 있는 마을로 6·25전쟁 후 원주역전 고지대에 윤락여성들이 집단으로 주거하면서 생긴 마을로 지금까지도 마을이름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주민들은 이러한 이름을 꺼리고 있다.

봉학로 [도로]
[위치] 학성중학교에서 사회종합복지관까지에 이르는 1.7km의 도로를 말한다.
[유래] 태장 1동과 학성동을 연결하므로 봉학로라 하였다.

북문거리(北門-) [길]
[위치] 학성동과 평원동 경계에 있는 길이다.
[유래]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북문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석거리(碑石-) [길]
[위치] 누문터 북서쪽에 있는 길이다.
[유래] 선정비(善政碑)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6·25전쟁 후 없어졌다고 한다.

새말 [마을]
[유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촌이라고도 한다.

송계촌(松溪村) [마을]
[위치] 학성동 천주교회 부근으로 단계동과 우산동과 인접한 마을이다.
[유래] 학성동 천주교회 주변 하천변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송계촌이라 불려졌으나 현재는 그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여제단터(▣祭壇-) [터]
[위치] 사직단 북동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원주 여제단이 있었던 터이다.
[유래] 사직단 동북쪽에 있는 조선시대 원주 여제단(●祭壇)의 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전시장 [장]
[위치] 원주역 앞에 있는 시장을 말한다.
[유래] 원주역 앞에 있는 시장으로 약 30여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유문 [마을]
[위치] 원주역 남서쪽에 있었던 마을을 말한다.
[유래] 조선시대에 유문[누문(樓門)]이 있었던 마을로 안유문과 바깥유문이 있었다고 한다. 유문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안유문 마을에는 사직당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당시 유문 부락민들은 유문을 통과하는 주민들이 많아 자연발생적으로 상업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전하며 역전시장을 중심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대다수이다.

유문보 [보]
[위치] 유문 앞에 있었던 보를 말한다.
[유래] 유문 앞에 있는 보로 봉천(鳳川)의 물을 끌어 정지들에 대었다고 한다.

정지(艇址) [마을]
[위치] 원주역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서쪽으로 우산동, 동쪽으로는 원주천 사이에 있다.
[유래] 원주천을 거슬러 봉산동 배말에서 소금을 싣고 가던 거룻배가 이곳 나룻터에서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이곳에는 많은 거룻배를 매어두었던 곳이라 하여 ‘정(艇)’자에 ‘지(址)’자를 써서 정지(艇址)라고 부르고 있다.

정지보 [보]
[위치] 정지 앞에 있었던 보를 말한다.
[유래] 정지 앞에 있는 보로 봉천물을 막아 정지들에 대었다고 한다.

청산골 [골]
[위치] 현재 MBC방송국 뒤편의 마을을 말한다. 과부골이라고도 한다.
[유래] 학성동에 있는 골짜기로 여기에 땀띠물이 있었다고 한다. 과부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과부골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현재는 쓰여지지 않고 있다.

하동리(下洞里) [마을]
[유래] 본래 원주읍내 아래쪽이 되므로 하동(下洞)이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부면(本部面)의 본읍리(本邑里)와 삼리(三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하동리(下洞里)라 하였으며 1938년 원주읍제 실시에 의하여 영정(榮町)·욱정(旭町)과 금정(錦町) 일부,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 일부로 나뉘었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영정을 학성동으로, 욱정을 평원동으로, 금정을 일산동으로, 본정 이정목을 중앙동으로 고쳤다고 한다.

희망촌(希望村) [마을]
[위치] 현재 단계초등학교 동쪽, 광명새마을금고 부근으로 법웅사 길건너를 말한다.
[유래] 1945년 광복 후 이재춘이라는 지역유지가 월남한 피난민들을 위하여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주고 피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출발하라는 뜻에서 희망촌으로 불리다가 1973년 3월경 광명마을금고 설립시 주민들의 총의로 마을이름을 광명마을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쓰여지고 있다.

희매촌 [마을]
[위치] 학성 1동에 있는 윤락여성 마을을 말한다.
[유래] 1950년 6·25전쟁 직후 희망촌과 매화촌을 합쳐서 희매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