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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톨도 나눠 먹는 정 많은 동네 중앙동 손경희 님, 최기순 님
글쓴이 원주 기록관 (admin) 작성일 2022-11-18 17:56:19 조회수 180

콩 한 톨도 나눠 먹는 정 많은 동네

중앙동 마을주민 인터뷰 손경희 님, 최기순 님

 




Q0. 인터뷰어 소개

손경희 님(58)은 중앙동에서 85년도부터 꽃집 운영을 했습니다.
최기순 님(56)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운영하시던 올챙이국수집을 2002년부터 물려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중앙시장에 오가며 아이들을 양육한 슈퍼우먼인 두 분은 가깝게는 미로 예술시장 조성에서부터 멀리는 90년대 풍경까지, 중앙시장 일대의 기억을 공유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Q1. 두 분은 언제부터 중앙동에서 가게를 운영하셨나요?


손경희 님

1985년부터 꽃집 운영을 했어요. 당시 중앙시장 건물은 낡았지만 사람은 많았어요. 그때랑 지금은 비교가 안 되지.
지금은 경기가 다 죽고 빈 가게도 엄청나지만, 당시에는 가게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 였어요. 칼국수 골목이 난전에 쫙 있어서 사람들이 줄도 길게 섰어요.
중앙시장이 되게 북적거렸죠. ‘노른자 땅이라고 말 할 정도로. 이제는 옛날 일이지. 예전보다 환경은 깨끗해졌지만,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그립네요.


최기순 님

2002125일부터 여기서 장사를 했고 그전에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친정어머니가 장사하셨어요.
친정 엄마가 처음 장사하실 때는 가게 없이 노점이었어요. 그 당시 시장풍경은 암흑가라고 해야 하나? 골목이 다 캄캄하고 엉망이었어요.
그러다가 우리 가게 옆에 숯불고기집을 하셨던 곽태길 번영회장님이 취임하면서부터 좋아졌죠.
우리와 가족처럼 지냈는데 중앙시장 번영회장인 걸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번영회장이라는 게 딱히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열심히 하셨죠.
그만큼 고생도 많으셨어요. 그분이 번영회장님이 되면서 옥상 방수도 하고 깨끗해 졌죠.
그런데 상인들이 가게에서 쓰다 고장 난 전자제품 같은 걸 옥상에 버려서 거기가 좀 무서웠죠. 우리는 낮에도 못 올라 갔어요.

 





Q2. 
두 분께서 보기에 이 근방이 어떻게 바뀐 것 같나요?

최기순 님

여기 가나다 동을 지은 사람이 다 다르다고 해요. 누가 잘 짓는지 내기를 했다고 해요. 전에 하수구 공사하느라 바닥 팔 때 보니까 철골이 엄청 나더라고요.
정말 튼튼하게 지었더라고요. 일방 통행으로 바뀐 지 근 십 년 정도 더 된 것 같은데, 양방향 통행이었을 때는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가는 사람도 적고 적막하잖아요. 특히 중앙시장 화재 이후 심해진 것 같아요. 반면 가게들은 예전에 비해 환해 졌죠.
우리 골목은 제가 2002년에 들어오고도 한 10년 뒤에 환해 졌어요. 2층은 더 어두웠죠.
한 집 걸러 한 집에서 어른들이 모여 화투를 치고 그랬는데 미로 시장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고 너무 좋죠.
지금은 중앙로(B도로)에 나무가 없지만 그때는 가로수도 있었고, 횡성까지 가는 62번 버스도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
중앙시장에서 제일 많이 변한 걸 꼽는다면 깨끗해진 노점 골목이죠. 예전에는 생선가게가 있어서 옷 버릴까 봐 지나다닐 때 조심했어요.
몸집이 큰 사람은 세로로 비켜 갈 정도로 통로가 좁았거든요. 특히 명절 때 보면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미처 못 들어온 사람도 많았을 거예요.

 

손경희 님

올챙이국수를 700원어치 그렇게 사 먹었어. 지금은 4,000원이에요. 중앙시장에 양품점도 많고 난전에 쌀장사, 과일 장사도 쫙 서 있었고.
장사라는 장사는 다 한 줄로 있었어지금 미로시장 있는 2층은 정말 좋지만 예전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곳 같았어요.
활성화된 건 몇 년 안 됐잖아요그리고 지금 강원감영 바로 옆 빌딩에 강원체신청과 원주우체국이 있었어요. 이전한 지 20년 정도 됐을 거야.
도로는 옛날하고 하늘과 땅 차이만큼 좋아졌지전깃줄도 다 나와 있었는데 지중화 사업으로 지금은 바깥에서 하나도 안 보이고요.
도로도 지금처럼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 2차선이었지바깥에 공동수도가 있었던 것도 그대로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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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이 미로시장으로 바뀌면서 180도 달라졌다는 것 외에는 예전하고 똑같아요. 가게들이 좀 바뀌긴 했네요.
오래된 자장면 집들이 메이커 옷 가게로 바뀌었거든요. 수선집 하셨던 분들도 많이 돌아가셨어. 그래도 옛날부터 장사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해.

 






Q3. 중앙시장의 경우, 화장실도 아주 열악했다고 들었어요.


최기순 님

지금 화장실은 깨끗하게 개조가 된 거예요. 그 전에는 칸막이만 있고 밑에는 다 뚫려서 옆에서 볼일 보는 소리가 다 들렸던 옛날 화장실이었죠.
남녀 칸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불편했어요. 그때는 화장실을 사용할 때 오십 원짜리 파란색 이용권을 사야했어요.
표 받는 분이 입구에 있어서 천 원어치 달라고 하면 한 장을 더 주고 그랬어.
한 장에 오십 원 하다가 시장 활성화되고부터는 돈을 안 받았어요. 1층에 화장실이 없었어요공동수도만 있었죠.

 

손경희 님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나는 급하면 집으로 뛰어갔어요. 그때는 다들 요강에 볼일을 봤는데 공동 수돗가가 우리 집 앞에 있었는데 거기다 휙 버리고 갔죠.
다들 그러고 살았으니까 그게 불편하다는 생각을 안 했죠. 자유시장 쪽은 새로 지어서 에어컨도 잘 나오고 좋죠.
건물을 새로 짓기 전에는 천막처럼 막 놓고 얼룩덜룩한 군복을 좌판에 걸어 놓고 그랬어요. 자유시장을 짓고 나서 시계탑이 생겼고요.
옛날에는 늦게까지 장사하느라 밤 9~10시까지 문 열고 있었는데 요즘은 오후 6~7시면 어지간한 데는 다 문을 닫아요. 그게 진짜 달라진 거지.



Q4.
지금은 말끔하게 개선되었지만, 예전엔 시설도 낙후가 되었었고 그동안 불도 자주 났었다죠?

손경희 님

1991년쯤엔가 2층에 큰불이 나서 20여 점포가 다 탔어요. 사람들이 창문으로 막 뛰어내리고 난리였지. 그 무렵 김영삼 대통령이 시장에 온 적이 있어요.
선거 때였는데 그때 우리 애를 포대기에 업고 구경을 갔어요. 그런데 나에게 100만 원을 주고 갔어요. 모 의원 시켜서 저기 아기 엄마 주라고 했다고 그래요.
엄청 큰돈이죠나는 그때 경기가 좋아서 돈을 잘 벌었을 때였는데 너무 놀랐어요.

 

최기순 님

2019년에 화재 났을 때 여기 없었어요. 불났다는 소식을 뉴스로만 봤어. 여차하면 우리 가게도 큰일 날뻔 했더라고요. 그을음 냄새가 우리가게에도 엄청났지.
열흘 정도 후에 문을 열었는데 그때까지 그을음 냄새가 안 빠지더라고요. 여기가 오래되다 보니 화재에 취약한 편이지.
그래도 건물 자체가 튼튼하게 잘 지어져서 그동안은 불이 났어도 그렇게까지는 큰 피해가 없었던 것 같아요.




Q5.
상인들 생활은 어땠나요?

 

손경희

그때는 서로 가족처럼 지냈어. 경기도 좋았으니까. 뭐든지 경기가 좋아야 마음도 편해져요. 요즘은 경기가 나빠서 시한폭탄 같아졌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지나고 보니 그때가 좋았더라고요. 그때 나도 꽃 장사하면서 우리 애 막 울면 과일가게에 한 번씩 맡기고 그랬죠.
같이 밥해서 먹고 재밌게 지냈어요7,000원 내면 상인들만 태우고 물건 하러 다니는 관광버스가 다녔어요나도 그 차 타고 남대문으로 꽃 하러 다녔지
원주에서 밤 늦게 출발해서 새벽 한두 시에 남대문 시장에 도착하면 물건을 하러 시장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거지
그렇게 물건을 해서 새벽 여섯 시쯤 버스를 다시 타고 원주로 내려왔어사정이 있어서 못 갈 때는 2~3000원을 주면 기사님들이 대신 사다 줬어요
그때는 물건 (떼러가는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어매번 버스가 꽉 차고 자리가 없으면 통로에 누워 간 적도 있고그렇게 경기가 좋았어
지금은 한두 명 태우고 조그만 차로 간다고 하더라고요예전에 80~90년대에는 학생들이 데모를 가끔 했어요.
데모 때 최루탄 터지면 눈도 못 떴어자주는 아니었고몇 번인가 본 거 같아요.

 

최기순

여기는 호마다 다 주인이 있어요. 그분들이 세를 주는 거죠. 한 칸이 2.5평 정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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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는 거의 많이 돌아가셨고 포목점은 2대로 넘어가는 분들도 있어요.
시장 역사가 50년쯤 되다 보니 가게를 팔고 가신 분들도 꽤 많아요. 제가 초창기 들어올 때보다도 팔고 가신 분들이 많아요
우리 집은 올챙이 국수 집이니까, 내가 기억이 나는 건 우리 엄마와 오빠가 새벽 두 시부터 맷돌에 옥수수를 퍼 넣고 갈아요.
그걸 가마솥에 풀처럼 묵을 쑤어서 어느 정도 뜸을 들인 다음 틀에 누르는 거예요. 누르면 찬물로 떨어지니까 응고가 되잖아요. 그걸 동이에 이고 시장까지 오셨어요.
소쿠리에 담기 전에는 동그란 채반에 김치와 간장을 넣고 숟가락 놓고 파는 거지. 체구도 작으셨는데 그걸 이고 시장까지 걸어오신 거야.
그때는 올챙이 국수 장사가 역전시장, 태장동, 도영쇼핑, 남부시장까지 많았어요. 강원도 산골이니까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잖아요.
옥수수를 쪄서 먹으면 몇 명이 못 먹었는데 양을 불리려고 올챙이 국수를 만든 거지. 우리 집은 손님들이 대를 이어와요.
제천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와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여기 올챙이 국수가 최고야이런 소리를 많이 하니까 나도 모르게 우쭐해요.
그 정신으로 더 열심히 해야 겠다고 생각해요. 우리 엄마의 유지를 받들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지요.

 
 

Q5.중앙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점포는 어디일까요?

 

손경희

OO 직물일 거예요. 친정 엄마가 하던 가게를 지금도 딸이 이어서 해요.
천을 사면 미싱으로 바느질도 해주고. 중앙시장에 미싱 하는 곳이 많았어요. 양복집도 많았고.

 

최기순

쌀집이 제일 오래됐었는데 얼마 전 그만두셨어. 여기 옆에 OO 한복 집. 사장님이 가끔 나오시는데 그 집도 참 오래 하셨어요.
포목점이랑 바느질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한복 대여점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많이 없어졌어요. 소고기 골목은 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처음 시장 생겼을 때부터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정식명칭이 소고기 골목으로 된 거는 돌아가신 번영회장님 때부터예요.



Q6.마지막으로 우리 동네 자랑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손경희

예전에는 이웃과 더불어 살았지. 혼자 잘난 사람은 없잖아. 다 주변 사람들하고 가족처럼 지냈어요.
칼국수 할머니들하고 엄마하고 딸처럼 지냈죠. 그런 정이 많았어. 뭐라도 먹이려고 하고 잔정이 많았어. 더불어 사는 그런 게 좋았어요.

 

최기순

이 동네는 정이 많아서 콩 한 톨이라도 나누어 먹으려고 해요. 잠깐 가게를 비워도 본인 가게처럼 장사를 다 해줘요.
하여튼 우리 골목은 정이 참 많아. 뭐 있으면 다 나누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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