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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
커피 자판기 하나 놓이면서 길카페로 부르기 시작 행구동 김영성 님
글쓴이 관리자 (webprime) 작성일 2022-11-18 15:09:43 조회수 240

 지신밟기하며 마을 단합 이뤘던 행구동

 

김영성 님
 



 

 

Q0. 인터뷰이 소개

김영성(66)행구동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 주민입니다.
김영성 님께서 거주하고 계신 행구동의 신월랑 마을은 새로운 달이 뜨는 고개라는 뜻을 지닌 지명에서도 짐작되듯, 치악산 자락 너른 구릉지에 있는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살구꽃,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걸음걸음 낭만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행구동에서 김영성 님은 오랜 세월 복숭아 농장을 일궈왔습니다.
마을 전통문화의 명맥을 잇고자 창설된 행구농악단 단장과 행구동통장협의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마을의 든든한 일꾼, 김영성 님과 함께 행구동의 옛 모습을 돌아봅니다.

 

 

Q1. 토박이 주민이시다보니 누구보다 행구동이 변화해 온 모습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동네가 많이 변했다고 느껴지실 때는 언제인가요?

15년 전부터 예전 건물을 많이 허물고 그 자리에 식당이나 카페도 많이 들어오고 농토도 변했어요. 말 그대로 논이 없어지고 밭이 됐는데,
그 전에 우리 마을 이름이 신다랭이였어요. 옛날 어르신들이 여기 사시면서 지명을 지을 때,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다랭이(다랑논)가 하나씩
새로 생긴다고 해서 정한 이름이라고 들었어요
. 마을이 활성화 되고 집들이 새로 들어오다 보니까 신다랭이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웃음)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서 마을 이름을 새로 논의 해서 지은 것이 신월랑이에요. 신월랑이 무슨 뜻이냐면 치악산을 바라다보니까 큰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데,
항상 새롭다고 해서 새로울 신(新), 달 월(月) 자를 쓴 거예요. ‘새로운 달이 뜬다.고 해서 신월랑, 옛날에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행구동은 살구 행(杏) 자를 썼는데, 이 밑에 살구둑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살구둑도 마찬가지고 신월랑 마을 집마다 살구나무가 있었어요.



Q2. 말씀하신 것처럼 행구동은 예전부터 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었는데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요.

 

지대가 높다 보니까 논을 만들려면 힘들잖아요. 베트남 같은 데 보면 길고 좁은 논 있잖아요. 그것처럼 여기도 다랭이를 만들었어요. 그전엔 벼가 참 귀했죠.
그전에 보리밥 하면 거기다 쌀을 조금씩 부어서 먹었죠. 농토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쌀밥을 많이 먹고. 거의 옥수수밥 먹고 보리밥 먹고 그랬어요.
그전에 고구마하고 감자는 돈을 좀 벌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옥수수, 보리, 콩 이런 걸 많이 재배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저수지계가 있었어요. 논농사 짓는 분들이 저수계장 한 분을 뽑아서 논마다 물을 대주는 분이 계셨어요. 저수지마다 따로 다 있었어요.
건넛마을 끝에담(신월랑 서쪽 끝 마을) 그쪽으로 논 있는 분들은 동막저수지를 이용했고. 쇄지(신월랑 동쪽) 쪽에서는 쇄지저수지 이용했고.
행구저수지(현재 수변공원 저수지)는 영랑동(현재 영랑길 인근)까지 다 그 물을 썼어요. 저수지마다 계장이 다 있었던 거죠. 행구저수지는 지금도 쓰고 있어요.
지금은 논이 많이 없어져 저수지가 다 메워졌거나, 앞으로 메워질 계획이거나 그래요.

행구저수지 쪽이 예전에 유격 훈련장이었어요. 지금도 시멘트 터가 있는데, 윗산에다 와이어를 걸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짚와이어인 거죠.
거기서 군인들이 와이어를 타고 내려와서 행구저수지 중간 쯤 와서 놔요. 그럼 보트로 건져 오고 했어요.
빨리 놔야 하는데, 물이 무서우니까 못 놓고 부딪혀서 당시에 군인들이 훈련하다가 사고도 자주 났는데 우리 어렸을 때 많이 봤어요.
그때는 민간인들이 못 들어갔지요. 우리가 한 열 살 정도 됐을 때까지 유격대가 있었어요.


 

Q3. 행구동에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생긴 이유가 있을까요?

 

그전에 장양리 쪽에서 (복숭아 농사)하시던 분이 이리로 이사 오다 보니까 아무래도 밭작물은 수지타산도 안 맞고 고생만 하니 복숭아를 많이 심기 시작한 거지.
그전에는 (치악산 복숭아) 작목반이 20명이 넘었어요. 지금은 열 명도 안 돼요. 이제는 총 8가구 되나 그래요. 그렇게 많이 줄었어요.
어르신들이 가꾸시던 복숭아밭을 자식들이 물려받은 집은 별로 안 돼요. 자식들이 (외지로) 나가 있는 사람 것까지 우리 같은 사람들(토박이)이 짓고 있죠.

  


Q4. 
행구동이 길카페로도 유명하잖아요이쪽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전에는 물을 계곡에서 가져 왔어요. 그러다 보니 수질도 안 좋아 시에서 따로 지하수 관정을 판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부터 자판기가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OO 씨라고 그분이 처음 자판기를 갖다 놨어요. 그게 길카페라고 불린 거예요.
여러 사람이 와서 자판기에서 차를 드시고 하니까, 나중에 이OO 씨가 근방에 카페를 차렸어요. 지금 카페들 생기기 전에는 다 밭이었고,
아주 예전엔 초가집들 있었고. 꽃밭머리 쪽은 원래 가구 수가 열 가구도 안 됐어요.
지금 남아 계시는 원주민은 한 가구 정도밖에 안 될 거고, 나머지는 다 외지에서 이주해온 분들이에요.
아주 옛날엔 여기부터 고둔치까지 화전이 엄청 많았다고 그래요. 정부에서 규제하다 보니까 다 내려오고 저 어렸을 때는 이미 없어졌더라고요.

 

 
 

Q5. 집과 농토 못지않게 도로도 변화가 많았지요?

우리 어렸을 때는 포장이 안 돼 있었어요. 폭도 좁고. 학교 다닐 때 길이 없어 논둑으로 다녔어요.
새마을사업 하면서 봉대초등학교로 넘어가는 길을 넓혔죠. 내려가다 보면 회전교차로 가기 전에 길이 하나 있죠? 그 길이에요.
큰길 포장되기 전에 차는 아예 안 다니다시피 하고 도보로 다니거나 소달구지 그런 게 다녔죠.
살구둑에는 둑이 있었어요. 거기가 다 진흙이다 보니까 장화를 신지 않으면 못 올라 갔어요신발이 다 벗겨지고 (흙이) 착착 달라붙어서.

옛날에 새마을운동할 때 길을 보수하고 그랬어요. 처음에 시멘트 포장을 했다가 차차 아스콘으로 바뀌었지요.
새마을운동 전후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길도 넓혀지고 한 것 같아요.

버스는 제가 한 열다섯 살 정도부터 다닌 것 같아요. 신작로 생기면서. 그전에도 비포장 길로 택시가 올라오긴 했어요. 시내서 어쩌다 오면 타고 가죠.
올라오면 타고 안 올라오면 못 타고. 거의 걸어 다녔죠. 지금 큰 길이 다 흙 길이었어요. 마을에 누가 결혼식 한다 그러면 막걸리 여섯 통을 실어서
자전거로 끌고 올라왔어요
여기 막걸리 공장이 없으니까.


 

Q6. 장례랑 결혼식도 다 동네에서 하셨겠어요.

옛날에 잔치하면 과방이라고 그래서 사랑방에 만들어요. 과자라든가 다식이라든가 음식을 만들어서 차려놨다가 나가는 데를 과방이라고 해요.
부엌에서는 국이나 이런 게 나가고. 과방 담당 어르신들이 따로 있었어요. 우리가 혹시 하나 얻어 먹어볼까 기웃기웃하고 그랬는데 얻어먹진 못했죠. (웃음)
접시에 차려서 나가야 하니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결혼할 때 꽃 가마 타고 오고 그랬어요. 건넛마을에서 가마 타고 오는 걸 봤어요.
장례도 그전에는 상여가 있었고 회다지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도 직접 회다지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Q7. 시장은 어디를 주로 많이 이용하셨나요?

 

시장도 예전에 광주리 이고 많이 걸어 다녔죠. 중앙시장하고 우물 시장으로 많이 갔죠. 우물 시장이 활성화됐을 때는 우리가 이 마을에서 숯을 많이 갖다 팔았어요.
지금도 숯가마터가 산에 많이 있어요. 원래는 그게 불법이죠. 그때는 다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숯을 팔아서 연명하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숯을 이고 가면 뒤에서 리어카로 싣고 같이 따라 내려가고 그랬어요. 옛날에 행구저수지 인근에 사격장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리어카 끌고 그 사격장을 지나면 총알이 뿅뿅 머리 위로 지나갔어요. 사람이 누가 다치진 않는데 저수지로 (총알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숯을 가져가서 우물 시장에 풀어놓고 어머니는 집마다 다니면서 팔았죠. 신월랑 동네 어머님들이 거의 다 숯을 파셨어요.
숯 만드시는 네다섯 분이 동네에 계셨어요. 산에 들어가서 숯만 굽는 거야. 참나무를 잘라 가지고. 가마솥에 불을 지펴서 다 막고 숯을 만들어내죠.
저도 예전에 숯 마중을 하러 갔어요. 아버지가 가지러 가면.
저도 지음 터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거기 원래 이름이 정 터 같아. 정씨가 살았다고 해서. 그게 말이 변해서 지음 터라고 하는데, 거기까지 숯 마중을 하러 갔어요.
산림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들켜서 숯과 지게 다 내버려 두고 도망가서 숨어 있다 그 사람들이 가면 숯을 지고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게 마을 생업 수단이었어요. 낮에는 논, 밭일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Q8. 예전에는 숯을 많이 파셨지만
요즘에는 행구동 특산물하면 아무래도 황골엿을 많이 떠올리는데황골엿은 언제부터 유명했나요?
그때가 1985년 정도쯤 될 거예요. 마을마다 공모사업을 하는데, 주로 그럴 땐 특산물을 많이 하잖아요.
그 지역에 옥수수라든가 재배가 많이 되다 보니까 옥수수 엿을 만들자, 그래서 집마다 하게 됐죠.

 

 

 

Q9. 마을 인구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겠어요사는 모습도 그렇고요.

 

대동회원이 지금은 53가구인데, 한창 많을 땐 90가구가 넘었어요. 관광 갈 때 관광차 세대로 가고 그랬어요.
대동회가 마을에 결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아직 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편이에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새마을운동하고 그럴 때 초가집이 다 거둬지고 슬레이트로 지붕이 개량되고 그랬지.
그런 다음에 세월이 흘러서 그것도 다 털어내고 슬라브 지붕으로 변했죠.
동네에 아직 옛날 집들이 몇 가구 남아있는데 사시던 어르신들 다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외지에 나가 있다 보니 빈집으로 남아있어요.

 

 

Q10. 마을에서 어떻게 노셨는지도 궁금해요.
그전에는 농악이 활성화 돼 대보름 때 지신밟기를 크게 했어요. 치악산 밑에 가서 조릿대를 꺾어다가 조리를 만들어서 며칠 전에 미리 던져 놓고
보름날 가서 지신밟기를 하는 거예요
.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액운을 몰아주고 복을 빌어주고 했어요.

학교도 그전에 한 학급에 60명이 1, 2반이 될 정도로 아이들이 많아서, 한 학년에 120명 정도 됐어요. 여기는 봉대초등학교만 다녔어요.
옛날에는 정월대보름 때 되면 망우리싸움(쥐불놀이)이라고, 개구지게 놀았죠. 위험하기도 하고. 이를테면 살구둑하고 신다랭이가 싸움이 붙는 거예요.
밤에 싸움이 붙어요. 그럼 돌하고 주머니에 넣어서 던지고. 살구둑 아이들은 우리보다 그래도 좀 깨어 있으니까. 우산대로 테이프 총을 만들었어.
화약총이라고 해서 납을 넣어서 쏘고. 그건 소리만 나지 별로 다치는 일은 없었어요.

행구저수지에서 예전에 저도 어릴 때 같이 갔습니다만 저수지 물이 줄어들면 거기서 고기도 잡았어요. 그런데 한 번은 6·​25 때 불발탄이 거기서 나온 거야.

어릴 때는 뭘 모르잖아요. 우리 형님 또래, 저랑 3~4년 정도 터울 나는 선배들이 그걸 꺼내 가지고 물 대는 보 시멘트 위에다 놓고
돌로 뚝딱뚝딱 두드리는 바람에 터져서 큰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 지금 생각하면 참 위험하게도 놀았죠.



 Q11. 그런 일이 종종 있었던 걸 보니여기가 전쟁 때 격전지였나봐요.

, 맞아요. 지금도 산에는 불발탄이 있을 수 있죠. 여기 우리 집 바로 앞에 1992년까지 빨래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포탄이 발견된 적도 있어요.
그걸 경찰에 신고해서 수거해가고 그랬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산에 나무하러 가면 가끔 철모도 주워 왔어요.
그리고 여기 보면 돌동미라고 이 동네 바로 맞은편에 산이 하나 있어요. 예전에는 돌동미에 헬기가 뜨고 그랬어요.
그 헬기 보자고 거기 기어 올라가면 (웃음) 바람이 벼락같이 불고 그랬어요지금 길 카페 쪽이 다 유격대 훈련장이었어요.
예전 6·25 때는 주민들이 강제 동원 돼서 ​인민군 시신을 지게에 짊어지고 돌동미에다 묻고 그랬대요.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작은아버지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지금도 아마 발굴하면 유해가 나올 거예요.


 

Q12. 마을 분들이 예전부터 단합이 잘 되셨다고요끝으로 마을 자랑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외지에서 오신 자영업자분들은 아무래도 생업 하느라 바빠서 못 오지만. 마을회관에서 대동회를 했죠.
회관이 3층 건물이다 보니까 어르신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맞은편에 식당이 있던 걸 허물고 그 자리에 경로당을 지었어요.
12
1일이 마을 총회를 하는 날이에요그때는 다 모이죠. 지금까지 계속 모이고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3~4년 못했는데 올해부턴 하게 될 거예요.
총회 때 모여서 음식도 하고, 마을 회의도 하고. 결산도 보고 그래요. 회비는 아주 옛날에는 집에서 각각 쌀 같은 거 가지고 와서 내기도 했어요.
한번은 우리 마을에 자녀 없는 분이 땅을 희사하신 일이 있었어요. 땅을 희사하면서 산소에 제를 지내 달라고 말하며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때부터 대동회에서 일 년에 제를 한 번씩 지내 드려요그날 총회도 하고 제도 지내고 하죠.
대동회  때 어르신들까지 다 모여서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합니다. 마을이 단합이 잘 되니까 아무래도 자랑스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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