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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페이지 내용 : 2ㆍ6·25전쟁과 원주 전투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한지도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바뀌어도 일곱 번이나 바뀌어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흔적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이 서려있는 상흔 傷痕 과 한민족 韓民族 의 아픔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으리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여 동안 전개된 6・25 전쟁은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대한민국과 유엔군 전사 178,569명, 부 상 555,022명, 실종 28,611명, 포로 14,158명 등 총 776,360명의 인명 피해가 났 다. 대한민국만을 보더라도 전사 137,899명, 실종 24,495명, 포로 8,343명 등 총 621,479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민간인 피해만도 사망 244,663명, 학살 128,936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등 총 990,968 명의 피해와 함께 피난민 320만여 명, 전쟁미망인 30만여 명, 전쟁고아 10만여 명 으로 나타났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분도 分道 임과 동시에 38선 접경지라서 더 큰 피해를 입었 다. 그 와중에서도 강원도청과 강원경찰국은 원주에서 피난도정과 피난도경을 펼 치면서 도민의 안위와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원주에는 접경지에서의 전 투가 오래 지속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힘겹게 피난생활을 하던 도민들이 많았다. 강원도에는 11개 군 郡 에 피난민 避難民 22,705세대 120,187명과 전재민 戰 災民 84,554세대 500,490명 등 총 107,259세대 620,677명이 있었다. 이중에서 원주에는 피난민 9,957세대 63,802명, 전재민 12,100세대 79,750명 등 총 22,057 세대 143,552명이 있었다. 1953년 당시 강원도에는 피난민수용소가 10개소 있었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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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 내용 : 서문ㆍ3 는데, 주문진수용소를 제외한 나머지 9개소는 모두 원주에 있었다. ‘모자료 母子 寮, 모자원 ’라고 하는 군경미망인수용소도 봉산동에 위치하였고, 60세대 345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원주에서의 전투는 크게 두 차례 진행되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1・4후퇴 당시 1951년 1월 5일부터 12일까지 벌인 전투와 중공군 제4차공세 때인 1951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전개된 전투이다. 물론 1950년 남침 초기 6월 30일에서 7월 1일간 원주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고, 다시 9월 30일 북진할 때도 한국 군 제6사단 제2연대 제3대대가 선발대로 11시에 원주까지 전진한 다음 계속 전 진하여 16시에는 횡성까지 진출하며 교전을 하였다. 이렇듯 1950년 원주에서는 산발적인 전투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잔병들과 전투를 하였다. 하지만 1951년 1월과 2월에 원주에서 치러진 전투는 6・25전쟁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큰 전투였다. 1951년 1・4후퇴 때 원주는 중부전선 제일의 요충 要衝 으 로 만일 적이 원주를 탈취한다면 충주를 거쳐 대전으로 진출하여 서울지구의 아 군을 고립시킬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남으로 제천-영주를 지향하여 안동 과 대구를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1951년 원주에서의 1월 전투는 미 제10군단 소속 제2사단과 이에 배속된 프랑 스대대・네덜란드대대・미 제37야전포병대대가 정면에서 공격하는 북한군 제5군 단 제6・제7・제12・제27・제38・제43사단 과 배후로 침투하는 북한군 제2군단 제2・제9・제31사단 을 맞이하여 전투하였다. 1월 8일에는 일단 원주를 벗어나 작전상 제천까지 후퇴하였다가 10일부터 원주 남부지역을 공격하여 11일에는 재 탈환을 위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혹한 속에서도 12일에 드디어 원주를 탈 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중동부전선의 한국군 철수작전을 엄호함과 동시에 적 군의 남침활동을 저지하고 차기의 반격작전을 위한 요충지를 고수하였다는데 의 미가 있었다. 이후 미 제2사단 제23연대 프랑스대대 예속 가 1951년 1월 31일부터 2월 2일 까지 원주 서북쪽 25㎞ 지점 원주-양평 간 중앙선 철도의 쌍굴 부근에서 중공군 제125사단을 상대로 벌어진 ‘쌍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는데, 한국군도 프 랑스대대 4중대에 편성되어 승리를견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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