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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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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가면

임윤지당선양관 사진
임윤지당선양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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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소
  • 역사(문화재)

임윤지당선양관

  •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서원대로 472-24 (단구동)
  • 대표전화 0507-1471-4701

소개

  • 이용안내휴무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 공휴일 다음날

    관람료: 무료
  • 이용시간이용시간 : 09:00~18:00 (17:30까지 입장가능)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성 성리학자로,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호는 윤지당(允摯堂)이다. 아버지는 함흥판관 임적(任適)이다.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9세부터 대성리학자인 오빠 임성주(任聖周)에게 『효경(孝經)』, 『열녀전(列女傳)』,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 『중용(中庸)』 등의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학습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婦德)을 쌓아 조금도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19세인 1739년(영조 15) 원주에 거주하는 선비 신광유(申光裕)와 혼인하였으나 8년 뒤에 남편과 사별하여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일생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하는 일이 없었던 임윤지당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으므로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다. 임윤지당 사후에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와 친정동생 임정주(任靖周)에 의해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가 간행되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경전 연구와 성리설(性理說)에 관한 논설과 선유(先儒)에 대한 인물 논평으로,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와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 예악설(禮樂說) ,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人說) 등은 이이(李珥)에서 시작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정통 성리학을 계승하였다. 묘소 위치에 대하여 『평산신씨족보』에는 정지안면 무지곡 뒷산 경좌로 나타나 있고, 현재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로 추정되고 있다.

◇원주와 임윤지당
원주는 임윤지당이 평산 신씨댁으로 시집와서 평생을 살았던 곳이고, 그녀의 묘소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녀는 1739년(영조 15)19세의 나이로 원주에 시집와서 1793년(정조 17) 작고할 때까지 55년간 원주에서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은 ‘봉천(鳳川) 구석(龜石)’으로, 현재 원주시 봉산동 원주초등학교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윤지당의 시댁인 평산 신씨 댁은 원주의 대표적인 명문집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저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대부분 원주에서 집필되었다. 따라서 임윤지당은 원주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높은 학문과 도덕으로 원주 지역사회에 많은 감화를 주었고, 이 때문에 널리 칭송을 받았다. 임윤지당은 원주가 낳은 위인으로 원주 시민들의 자랑스러운 조상이다. 또 우리 여성사 상(女性史上) 제1의 인물이다. 강릉의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비교하여 못할 분이 아니다. 현대는 남녀평등의 시대이고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다. 여성사에서 임윤지당이 가지는 위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퇴계나 율곡과 같은 존재이다. 원주시민들, 특히 여성들은 이 고장의 위대한 선각자요 대학자인 임윤지당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널리 선양해야 할 것이다.

위치 및 주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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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