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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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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제 3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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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소
  • 대표명소

상원사(제 3경)

  • 주소 강원 원주시 신림면 성남로 930
  • 대표전화 033-765-1608

소개

  • 이용안내금대리 방향: 21~25번 버스 / 30분 간격 운행
    성남리 방향: 23번 버스 / 일 5회 운행

◇시대 : 신라 시대 전통 사찰

◇내력 및 사지현황: 상원사(上院寺)는 치악산 남대봉 아래에 있는 사찰로서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선사(無着禪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관법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창건 이후로 고려말에 나옹화상이 중창하였고, 월봉·위학·정암·해봉·삼공·축념 등의 선사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왕들은 이 절에서 국태민안을 기도하게 하였다고 한다. 6.25전쟁 때 전소되어 폐허되었던 것을 1968년 당시 주지인 송문영 법사와 의성보살에 의하여 중신 복구되었다.

◇양식적 특징 :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4년 6월 2일에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심우당(尋牛堂)․심검당(尋劍堂)․범종각(梵鐘閣)․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3칸(8.4m)・측면 2칸(5.3m)의 겉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집이다. 법당의 불상은 새로 봉안한 것이고, 석가래와 기둥 등은 모두 정연하며 두공부(枓栱部)에 용두(龍頭)조각을 배치하여 주목을 끈다. 근년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보이는 질서 있는 건축물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란히 쌍탑이 있는데, 이러한 쌍탑이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삼국통일 이후로서 왕성한 국력에 의하여 전국도처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정형을 따른 2중 기단 위에 3층 옥개를 형성하였으며, 상부 상륜부는 둥글게 연꽃봉오리 모양을 새겨 일반 탑에서 보기 어려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의 좌측 탑의 바로 앞에는 화염문(火焰紋)을 보이는 불상 광배(光背)와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본래 석불이 있었음을 추정케 하나 현재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밖에도 절 뒤쪽 2백m 지점에는 높이 1m의 지극히 단조로우나 매우 오래된 부도가 있다. 상원사에 관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와 『여지도서(輿地圖書) 』의 기록에는 상원사의 위치와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도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집(梅月堂集)』, 권벌(權橃)의 『충재집(冲齋集)』, 이민구(李敏求)의 『동주집(東州集)』, 이상(李翔)의 『타우유고(打愚遺稿)』 등에도 상원사와 관련된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은혜 갚은 꿩설화
상원사에는 은혜 갚은 꿩의 전설이 전해온다. 치악산 기슭에 수행이 깊은 승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하였다. 그날 저녁 승려는 폐사가 되다시피 한 구룡사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승려는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친친 감고 노려보며 "네가 나의 먹이를 먹지 못하게 했으니 대신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이 산중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너를 살려주겠다"고 했다.
상원사에 가야만 종이 있는데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하여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세 번 울려왔다. 구렁이는 기뻐하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므로 다시는 원한을 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승려가 상원사로 올라가보니 종루 밑에는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원래 가을 단풍 빛이 아름다워 붉을 적(赤)자를 써 적악산이라 불렀는데 꿩의 보은설화로 인해 꿩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 상원사 석탑 및 광배 [문화재 분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시대 : 고려 초기 3층 석탑과 광배

◇내력 및 유물현황 : 치악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 대웅전 앞 탑정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2개의 석탑으로 상원사가 쌍탑식 가람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두 탑은 모두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을 쌓은 것이다. 1971년 12월 16일에 有形文化財 제25호로 지정된 石塔으로 總高 2.9m의 花崗岩 才質이다. 上院寺 大雄殿 앞에 있는 石塔은 좌우측에 1基씩 2基의 雙塔이 남아 있다. 해발 1,100m 이상의 높은 高地에 사찰이 경영된 것과 이러한 높은 곳에 쌍탑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쌍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1964년에 거의 완전할 정도로 보수하여 보존되어 있다.
석탑 옆에 불상 뒤를 장식하던 광배(光背)와 불상을 받치던 대좌(臺座)가 남아 있다. 광배에는 부처님의 머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둥근 선으로 새기고, 그 밖으로 불꽃 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연꽃과 당초(唐草) 무늬를 새겨 놓았다. 1964년에 우측 석탑을 보수할 때에 탑신에서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인왕상(仁王像)・아미타불립상(阿彌陀佛立像)・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의 금동불(金銅佛) 4구(軀)가 발견되었는데, 제작수법이 매우 우수하고 신라 때에 유행하던 수법과 같은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 광배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적 특징 : 두 탑의 형식은 비슷하며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되어 있다. 몇 장의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이중기단(二重基壇)을 구성하였는데, 하대중석(下臺中石)에는 우주(隅柱)를 주출(彫出)하였으며 4매로된 하대갑석(下臺甲石)의 상면에는 중석받침이 있다. 2매로 된 상대갑석(上臺甲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하며 위에는 4분원의 탑신 괴임을 두어 탑신을 받았다.1・2・3층의 옥신(屋身)에는 우주가 있으며 각 층의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다. 처마는 윗선과 아랫선이 평행이다가 전각(轉角)에서 약간 반전되어 경쾌한 기분을 주고 있다. 옥신 높이의 체감은 1층 부분에 비하여 2・3층 부분의 체감이 현격히 작은 반면 옥개의 체감율은 적은 편으로 전체적으로 탑의 솟음이 강조된 형태이다. 백마강 일대 산재해 있는 백제계 석탑의 체감비와 유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좌탑(左塔)에 노반(露盤)・보륜(寶輪)의 일부와 우탑에 보개(寶蓋)・수연(水烟)의 일부가 남아 있어 대부분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탑에서 옥개받침이 없이 사형(斜形)으로 처리된 점이며, 1964년 석탑 보수 때 탑신에서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보살상(菩薩像), 인왕상(仁王像), 불입상(佛立像) 2구 등 4구의 금동불상(金銅佛像)이 발견되어 이 탑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오른쪽 탑은 보개(寶蓋)[탑 상륜의 보륜과 수연 사이의 지붕 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탑의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가, 왼쪽 탑은 노반(露盤)[탑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지붕돌]․복발(覆鉢)[탑의 복발 위에 주발같이 엎어놓은 장식]․보륜(寶輪)[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대웅전의 좌측 탑 앞에 있는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2조 륭기선(隆起線)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으며 두광 중심부에 원을 새기고 그 주위에 8엽의 연화(蓮花)를 돌렸다. 그밖에 당초문(唐草文)을 조각하고 두광과 신광 외부에는 사실적으로 화염문(火焰文)을 양각(陽刻)하였다. 그러나 신광 부분은 깨져 결손되었고 우측의 대부분이 망실되었다. 대좌(臺座)는 상대석과 중대석이 없으며 하대석의 일부가 남아 8각형의 대좌였음을 짐작케 하며 복판복연(複瓣伏蓮)이 8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동탑 앞에 놓여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대웅전 [문화재 분류: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8호]
◇시대 및 용도: 백제, 혹은 신라 말기 치악산 남쪽에 위치한 상원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8.4m)・측면 2칸(5.3m)의 겉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집이다. 법당의 불상은 새로 봉안한 것이고, 석가래와 기둥 등은 모두 정연하며 두공부에 용두(龍頭)조각을 배치하여 주목을 끈다. 근년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보이는 질서 있는 건축물이다. 안쪽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및 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란히 쌍탑이 있는데, 이러한 쌍탑이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삼국통일 이후로서 왕성한 국력에 의하여 전국도처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정형을 따른 2중기단 위에 3층옥개를 형성하였으며, 상부 상륜부는 둥글게 연꽃봉오리 모양을 새겨 일반 탑에서 보기 어려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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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