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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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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
활동연도 984~1067
지광국사 해린(海麟)의 속성(俗姓)은 원씨(元氏), 자(字)는 거룡(巨龍),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으로 원주(原州) 출신이다. 984년(성종 3)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불교에 뜻이 깊어 법천사(法泉寺) 관웅(寬雄) 밑에서 수학(受學)하였고, 관웅이 개경(開京)으로 감에 따라 준광(俊光) 밑에서 삭발수도하였다. 해린이란 법명(法名)은 관웅이 붙여준 것이다. 999년(목종 2) 16세에 용흥사(龍興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1005년(목종 8)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법문(法文)도 출중하여 왕이 대덕(大德)이라는 법계(法階)를 내렸다.

1010년(현종 1) 법천사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1014년(현종 5)에 대사(大師)가되었다. 1021년(현종 12) 개경 중흥사(重興寺)에서 설법하였는데, 논리·문장력·음운학(音韻學)의 실력이 대단하였다. 1021∼1030년사이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고, 덕종(德宗) 연간(1031∼1034)에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좌(首座)가 되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의하였는데, 왕의 우대가 각별하였다. 1045년(정종 11)에 승통(僧統)이 되었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궁궐(宮闕)로 초빙되어 유심(唯心)의 묘의(妙義)를 강의하였다. 1054년(문종 8) 법상종의 총본산이었던 현화사(玄化寺)에 이석(移錫)하여 보수공사를 지휘하였고, 경전(經典)도 판각(板刻)하였다. 1056년(문종 10) 왕사(王師)가 되었고, 다음해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1059년(문종 13) 내전(內殿)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1067년(문종 21)에 법천사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입적하였다. 명봉산(鳴鳳山) 법천사 동쪽에서 다비(茶毗)하였는데, 문종이 깊이애도하여 지광(智光)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원주창고에 있던 양곡으로 경비에 충당토록 하였다. 해린의 탑비는 1085년(선종 2)소현(韶顯)의 주관아래 세워졌는데, 제자로는 현화사(玄化寺)의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문종의 아들인 도생승통(道生僧統) 석규(釋窺), 수좌(首座)는 경현(慶玄) 등 1,370여명이 있다. 해린은 유학(儒學)과 노장(老莊), 역산(曆算)도 익혔으며 박학하고 문장도 뛰어났다. 그가 고려 불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시기는 73세에 왕사가 되어 84세로 법천사로 하산할 때까지로, 이후 법상종은 현종(顯宗)대에 현화사가 창건됨으로써 전성기를 맞게 된다. 즉 해린은 고려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그가 강의한 것으로 화엄경에 나오는 유심묘의(唯心妙義)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법상종과 함께 당시 불교계에서 중요시되는 경전을 망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화사를 보수하고 경판(經板)을 판각하는 데 총지휘를 하였음을 볼 때 당시 귀족 불교계를 총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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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