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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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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
활동연도 1330~?
고려말 조선초의 은사(隱士)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자정(子正), 호(號)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의 손자이고,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原州) 원씨(元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같이 높은 지조와 절개를 보였다.
고려말에 정몽주·이색 등 많은 유학자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사적이 소각 당하는 화(禍)를 당하자 정몽주는 신현의 사적을 수거하여 치악산에 은거하는 원천석에게 보냈고,이에 후세에게 전할 중요한 임무를 갖고 화해사전(華海師傳)을 저술하였다. 문학적으로 깊은 소양을 가졌던 원천석은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 속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몰락의 원인이기도 했던 대토지겸병에 의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해, "무너진 집에 새들만 지저귀니 백성은 도망가고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민폐만 더했거늘 어느 날 어느 때 즐겁게 지냈으랴. 토지란 토지 권문가에 빼앗겼는데도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연이었네. 묻노니 이 고생 누구의 허물인고 남아있는 주민들 더욱 가엾어라."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서 대토지겸병으로 인해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탄식하고 그러한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는 모습에서 그의 대토지겸병의 반대입장을 볼 수 있다. 특히, "흥망(興亡)이 유수(有數)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ㅣ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  객(客)이 눈물 계워라."라는 회고가(懷古歌)는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수(眉 ) 허목(許穆)은 선생의 묘갈(墓碣)에서,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원천석의 정신은 원주의 사상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유적으로는 석경사(石逕寺)·변암(弁岩)·태종대(太宗臺) 등이 있고, 묘소는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있다.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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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