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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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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갑
활동연도 1525~1592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進士) 김석(金錫)이고,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병조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583년 우승지(右承旨)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다가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 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성균관(成均館)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追贈)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세웠고, 이곳에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忠烈碑)가 남아있다. 김제갑 목사의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남겼도다. 치악산(雉岳山)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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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