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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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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
활동연도 1552~1615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명길(鳴吉), 호(號)는 구암(久菴)이다. 할아버지는 군수(郡守) 한여필(韓汝弼)이며, 아버지는 경성판관(京城判官)을 지낸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建)의 딸이다. 효종조(孝宗朝)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한흥일(韓興一)은 그의 아들이다. 나이 16세에 이미 학문에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인 민순(閔純)에게 배움을 청하여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서적을 섭렵하여 학문의 정밀함과 식견에 있어 속유(俗儒)의 범주를 완전히 탈피했다. 1586년(선조 19)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간신히 모면하여 유배형(流配刑)에 그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사면(赦免)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왜적에게 아부하며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어 내자시(內資寺) 직장(直長)에 임명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국상자문위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611년(광해군 3) 잠시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부임하기도 했다. 선영(先塋)이 원주에 있어 성묘를 위해 자주 방문하였고, 이 과정에서 섬강(蟾江) 근처에 별장을 마련하여 아우 한준겸(韓浚謙)과 왕래하였다. 이후 만년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며 저술에 몰두했는데, 구암(久菴)이라는 호(號)는 원주 사람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살던 마을의 이름을 '수이촌(水伊村)'에서 '물이촌(勿移村)'으로 개명하고 서재를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 곳에 정착하여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이다. 이 외에도 저술로는 <기전고(箕田考)>·<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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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