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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원주소개 > 원주둘러보기 > 원주의 인물 > 향토인물 상세보기 - 성명, 활동연도, 인물소개, 파일 제공
김제남
활동연도 1562~1615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공언(恭彦)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뒤에는 1601년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 뽑힘으로써 돈녕도정(敦寧都正)이 되었고, 왕비(王妃)로 책정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封)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의주(義州)로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아들 셋도 화(禍)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손자 천석(天錫)과 군석(君錫)만이 화(禍)를 모면하여 부인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천석과 군석은 숨어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관작(官爵)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묘소는 1624년(인조 2) 양주(楊州)에서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으로 이장되었고, 김제남을 제향하는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신도비 비문(碑文)은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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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