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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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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활동연도 1594~1646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으로, 본관은 평택(平澤), 자(字)는 영백(英白), 호(號)는 고송(孤松)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7대손으로, 임황(林 )의 아들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충주 달천(達川)과 평안도 개천(价川)이 언급되고 있으나, 충북도지(忠北道誌)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평촌마을의 전설과 현지 주민, 그리고 임씨 문중에서는 손곡리 태생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길이 열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관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중군(中軍)으로 강화도까지 군사를 몰아갔으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은 이미 형제의 의(義)를 맺은 뒤였다. 당시 건주위(建州衛)에서 일어난 후금은 명(明)나라를 합병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원조와 대의명분 때문에 정객(政客)이나 친명파(親明派)들은 후금과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후금으로 투항하였고, 이들 반장(叛將)을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援兵)을 청했을 때 임경업이 나아가 토벌하여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총병(摠兵) 관직을 주기까지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데 진력하였다. 1638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안주(安州)에 병영(兵營)을 설치하고 청나라의 동태를 살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錦州)를 치게 되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하게 했다. 그러나 친명파(親明派)인 그는 대릉하 앞 석성도(石城島) 근처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형세를 알리고 명군(明軍)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모의는 청군에게 탄로되어 책망이 대단하여지자 조정은 그를 잡아 올리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깎고 장삼(長衫)을 걸친 후 스님 행세를 하였고, 한양 마포를 출발하여 중국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여서는 명나라에서 평로장군(平虜將軍) 벼슬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시켰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임경업은 석성(石城)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남경으로 옮긴 명나라는 곧 망하였고,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어 청나라 황제는 임경업에게 편발(編髮)하고 청에 귀순하라고 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북경옥(北京獄)에 갇히게 되었다. 1646년 6월 죄인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어 그해 6월 20일 심기원(沈器遠) 옥사(獄事)의 연루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졌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肅宗)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비는 임경업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8월 원주문화원에서 고증을 찾아 장군의 출생지인 생가 터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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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