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공연정보

원주시립교향악단 제100회 정기연주회

Great Composer II ‘Shostakovich’

 

지휘 : 김광현

협연 : 손열음(피아노)

 

 

PROGRAM

쇼스타코비치 축전 서곡 작품96

D. Shostakovich Festive Overture Op.96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 제2번 작품102

D. Shostakovich Piano Concerto No.2 in F Major, Op.102

Allegro

Andante

Allegro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작품47

D. Shostakovich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Moderato non troppo

Allegratto

Largo

Allegro non troppo

 

 

 

? Programnote

쇼스타코비치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시타인베르크와 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교향곡 제1번」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교향곡 제2번」(1927) 「교향곡 제3번」(1929),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33) 「피아노전주곡집」, 고골에 의한 오페라 「코」(1930), 발레 「황금시대」(19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19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1937년의 「교향곡 제5번」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 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교향곡 제7번」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교향곡 제9번」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1937∼1941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는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하여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쇼스타코비치 / 축전 서곡 작품96

소련 당 중앙 위원회가 1954년 제37회 혁명기념일을 위하여 위촉되어진 곡으로 작곡가의 내면에서 나온 순수 음악이 아니고, 일종의 목적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은 소비에트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즐거운 분위기로 넘치는 밝은 내용 때문에 취주악용으로 편곡되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쇼스타코비치 / 피아노협주곡 제2번 작품102

이 곡은 첫 번째 협주곡과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작곡되는데, 두 번째 협주곡의 탄생에 결정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작곡가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이다.

1938년 태어난 막심은 아버지를 닮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아버지를 여윈 나이와 자신의 아들이 같은 나이가 되던 1954년, 아들과의 피아노 연탄용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 작품 94를 작곡했다. 물론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이 작품에 대해 무척이나 정성을 들인 흔적이 남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장중한 서주로 시작해 육중한 걸음걸이로 나가던 곡은 갑자기 분위기를 일신해 장난기 어린 속주부로 넘어간다. 이는 협주곡 1번에서 들리던 악상들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에서는 원래의 의도와 같이 드미트리와 막심 부자의 연탄 연주로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이다.

1957년, 쇼스타코비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를 바탕으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다. 역시 자연스럽게 아들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제1번이 쓰여진 지 무려 24년이 지난 1957년도에 작곡 되었다. 모두 3악장으로 구성되었고, 전체적으로 힘있고 활달한 분위기이지만 안단테의 2악장은 모차르트나 다른 대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작품에 비겨 그 고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마음을 적시는 고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힘과 분위기가 묘하게 잘 조화되어 있는 곡이다.

제2번 협주곡은 눈부신 피아노 비르투오시티와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다이내믹의 역동적인 쾌감과 쾌속질주의 시원함을 안겨준 1악장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연주된 쇼팽 1번 협주곡 2악장의 감동에 비견할 만한 잘 절제된 심도 깊은 낭만성과 호화스럽되 차분한 음색을 들려주는 안단테 악장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3악장에서 그 건강한 힘과 재기 발랄함이 리튼의 치밀한 앙상블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 또한 대단히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제5번 작품47

「제5」와 「제9」에 해당하는 교향곡은, 베토벤 이래 전통적으로 중히 여겨 온 교향곡으로, 어느 작곡가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곡한다. 예컨대 드보르작의 제5번은 유명한 「신세계로부터」이며 (오늘날에는 제9번으로 되어있다), 차이콥스키의 제5번도 유명한 「안단테 칸타빌레」이고, 쇼스타코비치도 「제5번 교향곡」을 작곡함에 있어서는 베토벤의 「제5」를 의식하여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936년 1월 프라우다 신문 지상에서 격렬하게 비평받은 이래로 종래의 작곡 태도를 반성하고 ‘형식주의적 편향’을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제4번 교향곡」을 1936년 가을에, 「제5번 교향곡」을 37년 가을에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제5번 교향곡」은, 1937년 11월 21일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자마자 소련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에도 알려졌다.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상념속에서 인격의 형성을 생각하며 고뇌를 거쳐 거기에 도달하는 경지를 음악으로 구상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에서 나타낸 ‘극복과 승리’라는 악상과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의 베토벤 스타일’이라 일컬어진다.

표제는 주어져 있지 않지만 '제1악장 Moderato-Allegro non troppo는 어렸을 때의 회상, 제2악장 Allegretto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의 씁스레한 미소, 제3악장 Largo는 고뇌의 눈물, 제4악장 Allegro non troppo는 모든 의문에 대한 회답’이라고 적혀 있다.

 교향곡 제5번은 그가 지금까지 작곡한 15편의 교향곡 중 규모면에서 가장 장대하고 의도의 진지함과 그의 창작수법과 태도가 잘 집약된 최대의 걸작품이다.

 

? 협연자 프로필 

손열음 (피아노)

 

201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과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 최고연주상, 콩쿠르 위촉작품 최고연주상까지 휩쓴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뛰어난 통찰력과 한계 없는 테크닉,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이스라엘 필하모닉, 체코 필하모닉, 도쿄 필하모닉,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NDR라디오필하모니, NHK 심포니, 시애틀 심포니, 예루살렘 심포니, 스베틀라노프 심포니 (구 USSR 스테이트 심포니),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의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졌으며, 독일 라인가우 페스티벌, 바트 키싱엔 페스티벌, 프랑스 브장송 페스티벌, 폴란드 베토벤 부활절 페스티벌, 스웨덴 발틱시 페스티벌, 슬로베니아 류블리아나 페스티벌, 미국 포틀랜드 피아노 인터내셔널 등에 초청되어 연주하였다.

 

일찍이 국내에서는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부천, 수원, 대전, 부산, 울산, 광주, 원주시향을 비롯한 거의 모든 주요 교향악단들과 협연하였고 2007년 뉴욕 UN 총회장에서 열린 반기문 UN 사무총장 취임 축하 연주, 2012년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궁 음악회에서 연주,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동참하여 한미 동맹 60주년 기념 만찬에서 연주하는 등 대한민국의 문화사절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제1회 ‘금호음악인상’, ‘난파음악상’, 문화체육관광부의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고 동아일보의 ‘한국을 빛낼 100인’에 3년 연속 선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대표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10월 데뷔음반으로 발매한 쇼팽 에튀드 전곡집과 2008년 12월에는 쇼팽 녹턴을 피아노와 현을 위해 편곡해 녹음한 음반이 유니버설 레이블로 출시되어 있고 2009년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의 연주 실황 음원이 이듬해 아르모니아 문디 레이블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2012년 7월에는 한국의 독립음반사인 오뉴월뮤직에서 국내 기술 최초의 멀티채널 SACD를 출반하였다.

 

한편 중앙일보의 주말에디션인 중앙선데이의 최연소 고정 칼럼니스트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기도 한 그녀는 현재 고향인 강원도 원주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인 예술의전당의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 교수와 수학하였고, 현재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아리에 바르디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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