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공연정보

지휘 : 김광현

협연 : 이진상(피아노)

 

? Programnote

 

글린카 / 서곡 루슬란과 루드밀라

러시아의 귀족이었으며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글린카는 오페라와 관현악에서 획기적인 작품을 시도하고 만들어냈다. 베를리오즈의 대규모 관현악에 자극을 받았으며 스페인으로 건너가 <스페인 서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스페인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온 후 러시아 정교의 전례가에 화성을 붙이는 시도를 하였고 다시 작품탐구를 위해 베를린으로 건너가기도 했는데 스승 덴을 찾아간 베를린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얘기하는 러시아 5인조가 글린카의 음악 정신을 받아 이어간 후계자들이기도 하다. 

 

글린카가 남긴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은 경쾌하고 화려함이, 러시아의 매력적인 느낌과 같이 어울려 들리는 곡이다. 오페라는 푸시킨이 옛 민화를 소재로 쓴 풍자시를 바탕으로 글린카와 시르코프가 대본을 만들어 작곡한 것이라 한다. 오페라 속에서의 악상에 의한 곡이기 때문에 1842년 9월과 11월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글린카 자신의 얘기로 리허설을 하는 동안 틈틈이 연출가실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협주곡 제3번 작품30

확고한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라흐마니노프가 충분한 여력으로 정성들여 완성시킨 곡이며,세련된 수법을 찾아볼 수 있으나, 그런대로 개성적인 요소는 희박해진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개의 가락은 아름답고, 전체에 감도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러시아적인 정서, 피아노의 기교의 묘미는 이 곡을 매력있는 것으로 하고 있다.

 

피아노협주곡 제3번 중 D단조 1악장은 영화 '샤인'에서 OST로 실제 연주됨으로써 이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 유명한 곡이다.

 

이 협주곡은 1909년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의 러시아 음악협회 부회장 겸 교향약 연주회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을 무렵에 완성한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은 미국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의 완성을 서둘러 뉴욕에서 초연하려고 마음먹고 1909년 가을에 미국으로 가서 그해 1월 28일 뉴욕에서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하였다.

한편, 이곡은 그의 4개의 협주곡 중에서 내용이 가장 충실하고 작곡 기교에 완벽을 기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교향적 협주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풍부한 선율과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주어 '악마의 교향곡'이라 불릴 정도로 광기가 서려있어 독주자자나 오케스트라 모두에게 난곡으로 꼽힌다.

작곡가 자신도 인정했으며, 아르투루 루빈스타인은 그 난해함에 빗대어 이 작품에 '코끼리 협주곡'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제4번 작품36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6개의 교향곡 중 가장 변화가 많고 열정적인 곡으로, 고뇌하여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과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어두운 아름다움과 구성의 치밀함 그리고 관현악의 화려한 색체감이 돋보이는 곡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36세 때 자신에 내재되어있는 동성애적인 기질에서 벗어나고자 한 오페라 여가수에게 사랑에 빠지지만 매몰찬 거절을 당한 후 1877년 음악원 학생인 28세의 안토니아 이바노브나 미류코바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내적인 동성애의 본능이 정신적 문제를 일으켜 차이코프스키는 수 주 만에 이혼을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살까지 시도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정신적 재충전을 위해 유럽 여러 곳으로 요양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그의 걸작 오페라인 ?에프게니 오네긴?과 실패한 결혼 2달 전인 1877년에 착수한 제4번 교향곡을 1878년에 완성하였다. 차이코프스키가 다시 작곡에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 데에는 15년간 그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철도 갑부의 미망인인 폰 메크부인이 있었다. 폰 메크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아 연간 6천 루불이라는 막대한 연금을 제공했는데, 이 두 사람은 편지 왕래만 했을 뿐 끝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제4번 교향곡의 작곡 도중 메크부인에게 편지로 "저는 이것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 속에 당신의 가장 절친한 생각과 느낌이 반영된 것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믿습니다."라고 적었고, “우리의 교향곡”이라고 표현과 곡에 대한 자세한 설명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친구 작곡가 타네에프에게 "제4번 교향곡의 한 마디라도 내가 진정 느낀 것을 표현하고자 않는 것이 없으며 또한 나의 깊게 숨겨진 마음을 반영 안하는 것이 없다"고 써 보냈고, 성 페테스부르크에서 1878년 2월 22일의 연주를 마친 뒤 자신의 친구에게 "이 곡은 내가 작곡한 작품 중 최고"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2개월 만에 끝난 그의 불행한 결혼과 후원자 메크부인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우정) 등 인간적 고뇌와 그 역경을 이겨낸 과정이 리얼하게 반영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운명교향곡'이라 불리는 작품이다.

제4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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