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공연정보

 

저명연주가 시리즈<강원>

Distinguished Artists Series

2015.7.12 ~ 8.9

예술감독: 정명화 정경화

 

춘천 7월 12일(화)  19:30 춘천문화예술회관

원주 7월 19일(화) 19:30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대강당

원주 7월 21일(목)  19:30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대강당

평창 7월 22일(금)  19:30  평창문화예술회관

강릉 7월 28일(목)  19:30 강릉원주대학교  해람문화관

강릉 8월 1일(월)  19:00 선교장 야외공연장

정선 8월 3일(수)  19:30  정선아리랑센터

횡성 8월 4일(목)  19:30 횡성문화예술회관

횡계 8월 7일(일) 14:00 대관령성당

 

 

주최: 강원도, (재)강원문화재단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평창군

 

? Programnote

모차르트 / 극장지배인 서곡

쇤브룬 궁전에서 열린 축제를 위해 황제 요제프 2세의 청을 받고 모차르트가 작곡한 작품으로 규모가 큰 이 작품의 서곡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1막 10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견실한 구성과 독자적인 성격으로 모차르트 특유의 뛰어난 기교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오페라 극장 지배인은 모차르트 자신이 '음악이 붙은 1악장의 희극'이라는 명칭을 붙였듯이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매우 작은 소품이지만 재치와 유머로 가득한 작품이다.

 

하이든 / 첼로 협주곡 제2번 D장조

한때 하이든의 것이 아니라 하여 ‘가짜 논쟁’을 거치기도 한 곡으로 기교적인 중음주법 등 당대 기준으로서 탁월한 독주 부분의 기교는 결국 후세의 손길을 거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번 협주곡의 넘치는 활력을 지나 상쾌한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곡으로, ‘알레그로’라는 표기가 무색한 첫악장의 한가로운 주제부터 전원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하이든은 에스타르하지 후작에 봉사하던 약 30년간 6~8곡의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였다고 여겨지나 현시점에 있어서 하이든이 직접 작곡했다고 확인된 것은 제1번 C장조와 제2번 D장조이다.

제1번 C장조는 200년 가까이 귀족의 문고나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것을 1961년 음악학자 플케르트가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서 하이든 시대의 필사 악보에서 발견한 것이다. 제 1번 C장조는 원숙기에 쓰여진 제2번과는 달리 바로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하이든의 초기작품이다.

제2번 D장조는 하이든의 콘체르토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슈만, 드보르작의 걸작들과 함께 3대 첼로 협주곡이라고도 불린다.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전 부악장에 취임된 후 근 30년을 아이젠 슈타트에 잇는 궁전에서 거주했다. 비록 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이든 휘하에는 늘 일급 연주자들이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안톤 크라프트였다.

하이든은 그의 조언을 받아 이 협주곡을 1783년에 작곡했는데,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교라든가, 또 첼로의 서정적 성격을 완전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06년에 '작곡가의 원본에 의거하여'라는 주석을 달아 출간되었음에 불구하고 원작에 대한 논란이 오래 계속되었는데, 발설자는 다름아닌 크라프트의 아들 니콜라우스였다. 그러나 1953년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찾아냄으로써 의심이 풀렸고, 현재 원본은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이든은 이 곡을 원래 작은 실내합주를 위해 썼는데, 이를 19세기 말에 지휘자이며 음악학자인 제베르가 관현악 편성으로 확대시키고 솔로 부분과 카덴차를 보완했다. 1960년대에는 장드롱이 원작에 좀 더 가깝게 수정하여 출판했는데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베토벤 / 교향곡 제7번 A장조 작품92

베토벤이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 1812년은 그의 작품 활동이 주춤하기 시작한 시기다. 1802년부터 1809년까지 7년간 베토벤은 다섯 곡의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과 ‘열정’ 등의 걸작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1809년에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와 현악4중주 작품74, 피아노 소나타 ‘고별’ 등 걸작들을 계속 발표하며 지칠 줄 모르는 창작의욕을 과시했으나 1810년부터 차츰 작곡의 속도를 늦춰갔다. 그러던 중 1812년 4월 13일에 드디어 4년간의 교향곡 공백기를 깨고 몇 곡의 음악을 다 합쳐놓은 것만큼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담은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해내면서 교향곡 작곡가로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이루어진 [교향곡 제7]번의 초연무대는 베토벤의 경력에 있어 길이 기억될 만한 연주회였다. 연주 당시 부악장을 맡았던 작곡가 슈포어가 남긴 위의 증언을 보면 [교향곡 제7번]을 지휘할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력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날 공연은 베토벤의 공연들 가운데도 기억에 남을 만한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연주 당일 베토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관객들이 환호한 작품은 [교향곡 제7번]이 아니라 그날 공연에서 함께 연주된 [웰링턴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기도 하는 [웰링턴의 승리]는 메트로놈의 발명가 멜첼이 고안한 ‘판하르모니콘’이란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으로, ‘전쟁’과 ‘승리’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팡파르, 군대의 호출, 대포소리, 전쟁장면 등이 단순하게 묘사되고 마지막 종결부의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로 인해 대중들은 이 작품에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웰링턴의 승리]보다 [교향곡 제7번]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했던 베토벤은 청중의 이런 반응에 실망했고, 빈 신문에서 [교향곡 제7번]을 가리켜 [웰링턴의 승리]의 “들러리 작품”이라 칭한 것에 몹시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청중이 [교향곡 제7번]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특히 장송행진곡 풍의 2악장에 열광해, 베토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2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하기도 했다.

 

 

? 협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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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에 첼로 연주를 시작한 강승민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특별전형으로 입학, 정명화, 장형원 밑에서 수학했다. 2007년 독일 베를린의 한스 아이슬러 음악원으로 유학한 그녀는 그 곳에서 다비드 게링가스와 트뢸스 스파네를 사사했다. 여러 국내 콩쿨 및 국제 콩쿨에서 입상한 바 있는 그녀는 가장 최근 카사도 콩쿨 우승,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콩쿨에서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에서 5위를 차지했다. 활발한 리사이틀 활동과 더불어, 한국, 미국, 독일, 모나코, 리투아니아, 일본 등지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을 가지고 있다. 

제4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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