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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페이지 내용 : 4ㆍ6·25전쟁과 원주 전투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전개된 원주 전투에서는 미 제2사단 제38연대 네덜란 드대대와 프랑스대대 예속 , 제9연대 제1대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제2대대, 미 제187공수연대와 여기에 예속된 한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맡았다. 특히 원주 서북쪽의 325고지 만종역 뒷산, 영산 전투에서는 미 제2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대대와 제187공수연대 1개 중대, 그리고 보충된 한국군 카투사 178명이 고지를 두 번이나 빼앗겼다가 탈환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카투사 20명이 전사하 기도 하였다. 1951년 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세에 몰렸던 유엔군과 한국군이 원주 전투에 서 대승을 거둬 당시 한국을 포기하려던 유엔의 계획을 철회토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 제187공수연대 콜맨 J.D Coleman 예 비역 중령은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참전경험을 토대로 미국에서 발간한 Wonju-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 란 다큐멘터리 책을 통해 “지난 1951년 1・4후퇴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원주까지 밀렸던 유엔군과 한국군은 그 해 2월 14・15일 미군 제10군단, 한국군 제3사단 등이 원주를 포위한 중공군 제 117・120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만여 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결국 원주에서 1951년 1월과 2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두 차례에 걸친 큰 전 투에서 미 제2사단이 승리를 주도하였으며, 이 주도하는 병력 속에는 한국군 제 3사단 18연대와 한국군 카투사 500명 미군에 240명 정도, 프랑스대대에 60여 명, 네덜란드대대에 178명 남짓 병력이 활동하며 승전에 일조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6・25전쟁 가운데 원주에서의 전투가 갖는 의미 를 생각해 보았다. 제1장 「6・25전쟁의 발발과 원주로의 후퇴」에서는 6・25전쟁 발발과 춘천대첩, 홍천 말고개 전투의 승리와 원주 지연전을 다루었다. 제2장 「아군의 반격과 원주 수복」에서는 원주 수복과 북진, 원주에서의 강원도 청 피난도정 避難道政 , 강원경찰국 피난도경 避難道警 을 다루었다. 제3장 「1・4후퇴와 원주 공방전」에서는 중공군 개입과 1・4후퇴에 따른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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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페이지 내용 : 서문ㆍ5 군 참전과 유엔군의 철수작전, 원주에서의 공방전과 승리를 다루면서 유엔군 즉 미군・네덜란드대대・프랑스대대의 선전한 내용을 그들의 시각에서도 제시하였다. 아울러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의 전초전인 쌍굴 전투도 기술하였다. 제4장 「아군의 재반격과 전환점 원주」에서는 원주에서의 횡성 진격준비와 라운 더업 작전의 횡성 전투, 중공군 반격과 아군 철수전, 이에 따른 횡성 전투의 성 격도 다루었다. 동시에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지평리 전투와 원주 구름실 325고지 전투, 그리고 미 2사단의 원주노선 구축, 네덜란드군인들이 말하는 325고지 전투 도 기록으로 남겼다. 이어 원주에서 시작된 한국군 제3사단의 강림-안흥-봉화산 진격전도 다루었다. 제5장 「6・25전쟁 시기 원주 민간인 희생과 피난민 생활」에서는 원주 민간인 희생사건을 원주 국민보도연맹원의 피살, 북한군 후퇴기의 양민학살과 납치, 1차 수복 이후 원주 민간인 피살사건 등으로 구분지어 다루었고, 2차 수복 후 원주 지 역의 구호와 피난민수용소 생활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었다. 제6장 부록에서는 「증언자들이 말하는 원주 전투와 원주사회」에서는 장윤・안 공혁・한영희・김종경 그리고 흥업과 문막 주민들이 전하는 6・25전쟁 참상을 다 루었다. 아울러 원주의 6・25전쟁 현충시설인 6・25참전용사기념비, 귀래면 6・ 25참전용사기념비, 원주시 무공탑, 원주지구전투전적비, 육군 소령 심일 동상, 육 군 중위 조유환 전공비, 한국전 UN프랑스군 원주지구전투전적비, 부론면 6・25 참전유공자기념비, 흥업면 6・25참전기념비, 원주경찰전적탑, 문막면 6・25참전 용사기념비 등을 실었다. 그리고 사진으로 본 미군의 6・25전쟁 이후 원주 모습, 현충탑 건립과 현충일 추념식 등 다양한 현충행사를 실었다. 6・25전쟁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원주 지역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하려고 하는 데 자판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게으름과 내용의 미흡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운 마음일 것이다. 전쟁의 흐름이나 판도를 바꾼다는 것은 치밀한 전략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1951년 2월 1315일에 벌어진 지평리 전 투와 함께 원주 전투의 승리는 6・25전쟁의 대전환점이 되었는데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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