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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성씨와 친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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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이야기

박계훈씨 등이 속한 원주 일대의 유력 성씨인 밀양 박씨는 봉사공 박위(朴緯)를 파시조로 하는 봉사공파(奉事公派) 중 소파인 지포공파(芝圃公派)다.
판부면에서 제일가는 부자집이었던 박연식(일명 연구)씨 댁이 이 파에 속한다. 봉사공파는 박척(朴陟)을 중시조로 하는 충헌공파(衷憲公派)의 분파다. 밀양 박씨 내의 봉사공파로는 태사공(太篩公) 언부(彦孚)의 후손 중 밀직부원군 중미(中美)의 둘째아들인 대사헌공(大司憲公)해의 아들 중 홍(鴻)을 파시조로 하는 곳도 있다.

박옥현 (방묘 거주, 1932년 임신생)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자란 박옥현 씨는 밀양 박 씨 변제공파 26대손이다. 박옥현씨 일가는 경북 청도군 금천면에 많이 사는데, 조부가 여주에서 잠시 살다가 당대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조부 이하 산소(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는 이곳에 있고, 증조부 이상은 청도에 있다.

박계훈

박계훈 씨는 부근 땅이 대부분 그 집 소유여서 아버지 대부터 반병작으로 소작을 얻어 지었고 아버지를 따라 그 역시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 소작으로 농사를 시작한 그가 자기 소유의 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소를 키웠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그만 송아지를 사서 키워 새끼를 낳아 늘려갔다. 그중에는 일도 가르쳐 부리던 일소도 있었다. 형님은 문 짜는 것을 배워 소목도 하고 대목도 했다. 목수는 수고비로 하루에 쌀 한말을 받았는데, 일반 품삯은 보리쌀 서너 되인 시절이어서 형이 집안경제를 일으켰다. 아버지 형제로는 작은 아버지 한 분으로 살다가 일본에 가서 돌아가셨다. 동생은 정선 사북에 산다

박용석 (뒷골 거주, 1929년생)

박용석 씨도 밀양 박씨이지만, 파가 다르다. 원래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군 청풍면 서산동으로, 여기 온 것은 26살 정도 되어서였다. 영천에 살 당시 경제사정이 안 좋아서 먹고 살기 힘들었지만, 이곳에 와 반곡역 맞은편에 자리 잡고 술장사와 밥장사를 하였다. 반곡역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장사가 잘 되었다.

강릉최씨 이야기

강릉(江陵) 최씨(崔氏)는 본관은 같지만 상계(上系)가 다른 세 계통이 있다.
첫째는 고려시기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고 영첨의좌정승(領僉義佐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 계통이며, 셋째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러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 계통이다.

최성침 (뒷골 거주, 1936년)

해방 전후 뒷골의 40호중 강릉최씨는 모두 세집이었다. 최성침 씨 댁과 작은집, 그리고 건넌집이다. 그의 5대조 할머니는 철종 때 열녀로 정려를 받은 분이며, 최규하 전 대통령은 강릉 최 씨 집안으로 최성침씨와는 5대조에서 갈라진 집안이다.

청송심씨 이야기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받든다.
그의 4세손 심덕부(沈德符)는 고려 충숙왕 때 왜구의 침입을 물리쳤고,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심덕부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정종 즉위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청송 심씨는 심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 와서 융성하였다.

심재선 (유만 마을 거주, 1931년생)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후 족보에 올리지 않다가 2002년 후손들이 한꺼번에 36명을 대동보에 올렸다. 그 돈으로 거의 100만 원 정도 지출하였고 호적정리도 그 때 한꺼번에 다하게 되었다. 집안에 제사는 기제사를 지내고, 설과 추석 때 성묘한다.

영월신씨 이야기

시조는 고려 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신경(辛鏡)이다.
각 파조 별로 보면 중정대부 신성렬(辛成烈)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판밀직사사(判密直司寺)를 지낸 신천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신혁(辛革)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영월부원군에 봉해진 신온(辛蘊)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가 있다.

신기선 (뒷골 거주, 72세)

영월 신 씨는 방묘 마을로 들어온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성씨이다. 신기선 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영월 신서방네라고 불리웠다. 조실부모하고 마을에는 네 형제만 살고 있으며, 큰 집은 속초에 살고 횡성에도 일가가 있다.

영천황보씨 이야기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귀화한 황보경(皇甫鏡)을 우리나라 황보씨의 시원으로 보는데, 황보경(皇甫鏡)의 증손 능장(能長)은 고려 태조 때 금강성 장군으로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를 계기로 관향을 영천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 황보씨는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항(抗)과 대사성을 지낸 탁(倬)이 있고, 정종 때 참지정사와 평장사를 지낸 영(穎)과 고종 때 좌복야와 문하사랑평장사에 이른 기(琦) 등이 있다. 유의(兪義)는 고려 현종 때 중추사를 거쳐 이부상서와 참지정사를 지냈고 덕종 때는 문하평장사에 올랐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토평하고 일등공신에 오른 임은 1388년 요동정벌 때 부원수로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고 삼도 도체찰사가 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황보철 (방묘 거주, 1938년생)

조부 때 반곡동 뒷골로 이사왔으며, 부모대에 뱅이둑, 즉 방묘로 분가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조상 중에 고종 때 한성판윤을 지내신 분이 계시며, 고조 할아버지께서는 동정대부 품계를 받으셨다. 시제는 문산으로 가서 황보인에 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전국 단위에서 황보인 시제를 지내러 온다. 어머니께서 7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부인이 극진히 효도하였다.

그외의 이야기

김영길 (봉대마을 거주, 1927년생)

김해 김씨인 김영길 씨는 원래 충주에 살다가 봉대마을로 다시 다섯 살 때 이사왔다.
10리 이상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으며, 군대에 다녀와서는 논3,000평, 밭2,000평 정도를 지었다.

엄중화 (봉대마을 거주, 1936년생)

영월 엄씨인 엄중화 씨는 만주 연변에서 태어나 12살 정도에 남한에 들어왔다. 공산당 몰래 낮에는 쉬고 밤에만 걸어서 들어왔다. 만주에서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동네 이장 일을 보았다. 아버님 고향이 중원군이라 처음에는 그곳으로 갔다. 그러다 장사를 하다 보니 교통이 좋은 원주가 나을 것 같아 이사하였다. 장사는 여러가지를 했는데, 주로 잎담배를 충주에서 구입해 서울에 가서 팔아 돈을 벌었다. 열다섯 살에 단구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해서 12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영환 (서리실 거주, 1936년생)

경주 김씨인 김영환 씨는 증조부 때부터 강원도 평창 방림면 계촌리에 거주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당숙을 따라 전답을 팔아서 원주로 왔으며, 전쟁이 나고 1952년 11월쯤에 서리실 마을에 들어왔다. 김영환씨는 전쟁이 끝나고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마을에 38사단이 들어오면서 세대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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