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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시정소식

작성일 2010.04.15 조회수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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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조 호국선열을 모신 충렬사(忠烈祠)
작성자 관리자
충렬사(忠烈祠)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의 합단적(哈丹賊) 침입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의 왜적(倭敵) 침략에 맞서 국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1290년 원나라 반적(叛賊) 합단적(哈丹賊, 카단)이 고려의 동북 변방을 침입한 이후 1291년 교주도[강원도]로 난입하여 양근[양평]을 점령하고 원주에 이르러 치악산 영원산성을 공격하자,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소속되어 있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은 결사대(決死隊)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등 다수의 원주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1592년(조선 선조25년) 8월 25일 임진왜란은 최대의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왜적이 영동지방을 짓밟고 남한강 상류를 따라 원주를 침입하자, 원주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은 영원산성에서 결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영원산성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김제갑 원주목사는 왜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작은아들 김시백(金時伯) 또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비보(悲報)를 접한 부인 전주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김제갑 목사와 아들 그리고 부인의 순절은 충(忠)·효(孝)·열(烈)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앞서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1592년 5월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패주하는 적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여 서울로 향하던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러한 승첩(勝捷)으로 경기(京畿)·강원(江原) 양도조방장(兩道助防將) 겸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임명되었다. 이후 왜적에 의해 철원·평강·김화 등이 유린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김화에 이르러 분전하였으나 왜적의 형세를 당할 수 없어 왜적에게 굴복되기 전에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1669년(조선 현종 10년) 원주 하동리(下洞里)에 14칸으로 건립된 충렬사는 원주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1670년(조선 현종 11년)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고,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충숙공(忠肅公) 원충갑(元沖甲)·원주목사(原州牧使)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여주목사(驪州牧使) 충장공(忠壯公) 원호(元豪) 등 3위(位)를 배향(配享)하였다.
1871년(조선 고종 8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려 없어진 이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원주원씨운곡대종회에서 건립 부지를 희사함에 따라 2009년 복원하고 매년 음력 2월 7일 원주시민의 정성을 모아 제향(祭享)하고 있다.

(☎관련부서 : 문화관광과
737-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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