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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동

봉산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원주의 중심지였다.  원주경찰서, 원주교육청, 원주도서관, 원주세무서가 있었고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만 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다.
생명과 협동 운동을 시작한 장일순 선생님이 사셨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살던 곳도 봉산동이다.  1993년 삼광택지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며 인구는 더 늘었지만 원주혁신도시, 기업도시가 생기면서 점점 삶의 터를 옮겨가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 봉황이 품고 바라보고 있는 동네

    봉산동은 봉산(鳳山)이 있어서 산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원주경찰서 뒤편에 있는 봉산(233m)의 모양은 봉황이 날개를 펴고 원주를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하여 붙여졌으며 봉산의 끝 봉을 봉산미라고 부른다.
    원주천에 배가 자주 드나들면서 인근 배말이라는 마을이 생겨났고 불과 100m 거리에 있는 우물마을에서 장이 열렸는데 이곳이 우물시장(동부시장)이다.
    또 곳곳에는 논과 밭이 많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마을도 생겨났는데 기록에 의하면 배말, 번재, 살대울, 삼광, 우물, 화실 등 20여 개의 마을이 봉산동에 있었다.

  •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봉산

    봉산동은 예로부터 인물이 많고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 대통령이 원주초교를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가 봉산동이다.  또 반독재 투쟁과 생명운동을 펼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평생을 살아온 곳이다.  장일순 선생은 1970년대 반독재 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자연 복구를 주장하는 생명 사상운동을 펼쳤다.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 작업을 했다.
    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은 봉산동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세의 나이로 원주에 시집와서 작고할 때까지 55년 동안 살았으며 권투선수 지용주는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권투를 시작해 1968년 제19회 멕시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원주를 복싱의 도시로 성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봉산의 기운을 되살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다

    봉산동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높이 233m의 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걸출한 인물을 많이 내주었다고 알려져 일제강점기에는 영기를 막기 위해 봉산미 부근에 쇠말뚝을 박고 중앙선 철도를 건설했다고 한다.  중앙선 철도는 강원도 내륙의 금, 동, 아연, 흑연, 석탄, 석회석을 빠르게 인천항으로 반출하기 위한 용도로 건설됐는데 이러한 안타까운 사실을 듣고 손창관 옹이 건립기금 일체를 부담해 1939년 봉산미 정상에 학봉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이와 함께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상거래가 이뤄졌던 지역이다.  원주경찰서와 원주세무서, 원주교육청(이후 원주도서관), 원주시립도서관, 원주옻문화센터 등 공공기관 등이 모여 있었으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원주 최초의 공립학교인 원주초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