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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의 추억 브라더미싱 이창화 대표
글쓴이 원주시 기록관 (rmshome) 작성일 2024-04-18 10:52:34 조회수 12

재단사의 추억




 

과거 원주의 중앙동은 양복점과 양장점이 한 집 건너 한 집 있을 정도로 많았다. 기성복이 나오기 전이라 대부분 옷을 맞춰 입던 시절이었다. 옷을 맞춰 입으니 당연히 수선집도 함께 있었고, 양재학원도 덩달아 잘되던 때였다. 주상복합 건물로 들어선 자유 상가 1층에는 70~80%가 수선집일 정도로 절정기였다. 그곳에서 평생을 재봉기와 함께 한 사람이 있다. 그들의 삶과 애환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토끼 판 돈 들고 찾아온 원주

 

올해로 57. 이창화 브라더미싱 대표가 미싱과 함께해 온 시간이다. 19661129일 진부에서 토끼를 잡아 판 돈 4,000원을 들고 무작정 원주에 왔다. 먹고 살아가기 위해 중앙시장에서 재봉에 손을 댔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청계천까지 가서 3년 동안 독학을 했다. 그때의 중앙시장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지밥과 보리밥, 쌀밥을 20~30원에 팔았다. 배고프던 시절, 쌀밥 대신 양이 많은 비지밥을 사서 먹었다. 농협 앞 창성미싱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당시에도 자유시장이라고 불리던 곳은 미제로 넘쳐났다. 영화 <국제시장>과 분위기가 거의 흡사한 소위 양키 시장이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 일하던 곳은 창성 미싱이었고 19661226일 중앙미싱으로 가게 이름이 바뀌었고, 그 후 지금의 브라더미싱으로 다시 한번 가게 이름이 변했다. 농협 앞 도로 건너편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잠시 자유 상가 옆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원래 이 자리는 미공사였다. 군인들 명찰을 오바로크 해주고 관련 물건을 팔던 곳이었다. 원주가 군사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군인극장 주변으로 특히 양복점과 양장점, 수선집이 많았다. 군인들이 거리를 주름잡고 군인극장 옆에는 군인백화점도 자리했다. 전축, TV 등 가전제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군인 가족의 쇼핑 장소로 유명세를 탔다.

 

그때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수두룩했다. 양복점과 양장점이 사라지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이 수선집으로 돌아섰다. 양재학원도 있었다. ‘뉴스타일 양재학원이 분수대오거리 쪽에 있었다. 당시 차부라고 불리던 버스터미널 근처였다. 그 집 아들이 <피노키오> 양장점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이영희 씨가 일했다. 그리고 이창화 대표를 만나 1973년 결혼했다. 당시에는 혼수품으로 재봉기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1966년 원주에 처음 왔을 때 미싱 가게가 11곳 있었다. 면 단위에는 미싱 한 대 있을까 말까 하던 때다. 재봉기가 귀했던 시절에는 중앙동에서 원주 어디든 자전거로 배달했다. 그때는 문막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였는데 아침 먹고 자전거로 배달 가면 종일 걸렸다. 단순하게 배달만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용법까지 알려줘야 했다. 주인만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에서도 구경을 오곤 했다.

 

공장은 없어도 늘어나는 수선집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호황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옷을 맞춰 입어야 했고, 수선도 해야 했기 때문에 밤새워 일하는 것이 흔했다. 물량이 워낙 많았다. 그때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거리가 넘쳤다. 이 대표는 강원도 전체는 물론이고 충북과 경기도 일부까지 거래처를 확장했다. 재봉기가 있는 곳이면 모두 거래처였다.

 

그렇게 호황이던 시절도 끝나고 양복점과 양장점에도 불황이 닥쳤다. 1990년대 기성복의 등장으로 서서히 쇠퇴해 갔고, 양복점과 양장점에서 일하던 기술자들도 수선집으로 눈을 돌렸다. 기술이 있었으니 창업도 가능했다. 외국으로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도 늘었다. 이창화 대표는 눈이 어두워지고 안 보일 때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자신을 믿고 있는 거래처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거래할 때 자신을 쳐다보고 거래했기 때문에 돈이 생겼다고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미싱하는 곳이 많았어도 이창화 대표가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기술이었다. 여기에 신뢰를 더했다. 원주에도 일부 봉제공장이 있었다. 본사는 모두 서울에 있었지만, 하청 업체가 우산동 쪽에 몰려 있었다. 가방공장과 인형공장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가내공업이었다. 세월은 흘렀어도 수선집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공장은 모두 중국 쪽으로 옮기고 있지만, 수선은 역시 국내에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싱은 가정주부들이 취미로도 많이 이용한다. 젊은 주부들은 집에서 놀지를 않고 뭐든 배우려고 하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가 미싱이다. 요즘은 미싱기도 좋아져서 작동하기도 어렵지 않다.

 

원주의 명동, 과거 중앙동으로 귀환을 꿈꾸다

 

이 대표는 중앙동의 오래된 건물로 금성 호텔을 꼽았다. 1966년 원주에 왔을 때 이미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금성 호텔은 고위 군 간부들이 잠을 자던 곳이었어요. 거기다 평원동 쪽은 부촌이었거든요. 서울에 가면 명동이 대표적인 번화가잖아요. 원주는 중앙동이 대표적인 번화가였죠. 과거의 중앙동은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로 북적였거든요. 주점과 호프집, 먹자골목에 사람들이 넘쳐났어요. 이 거리가 예전처럼 다시 한번 활성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오래된 곳으로 치면 순대 골목도 있어요. 형태도 거의 그대로죠. 어려웠던 시절 서민들이 쉽게 소주 한잔하면서 시름을 달랬던 곳이에요.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하루하루 지내던 시절이었어요.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순대 골목이 그대로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중앙동 일대가 쇠락의 길을 걷는데 지하상가도 한몫했다고 생각하는 상인들이 많다. 지하상가로 인해 건널목이 없어졌고, 유동 인구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상권이 예전처럼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다. 군인극장이 허물어지고 지금의 보건소 자리도 오랜 기간 방치되면서 공동화는 더 심해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저녁 8~9시만 되면 중앙동은 어둠의 도시로 전락했다. 그나마 소고기 골목 등이 있어서 사람들 왕래가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중앙시장 2층은 정말 허름했었다. 목조로 된 2층 건물이어서 기어 올라가고 기어 내려올 만큼 취약했다. 그래도 사람은 많았다. 방치되다시피 하던 2층은 미로 예술시장 덕에 많이 좋아졌다. 젊은 세대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가득 찬미로 예술시장이 힘을 받아 과거 중앙동의 영광을 되찾아 가는 중이다.

이 대표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호황이던 때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 욕심이 되어 버렸다. 도로도 좁아 관광버스가 와도 시장 주변에는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다. “관광객들을 풀어놓아야 시장에서 살 것도 사고 구경도 하면서 활성화가 될 텐데 그런 것이 없어 안타깝지요. 버스를 세울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쳐 버리는 거죠. 그런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중앙동에 사람은 많다. 다른 도시의 시장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다. 이 대표를 비롯한 많은 상인은 원주민과 외지인이 좀 더 머물고 싶은 중앙동으로의 귀환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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