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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가면
  • 원주에가면

원주에가면

원주 강원감영 사진
원주 강원감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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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소
  • 역사(문화재)

원주 강원감영

  •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 77 (일산동)
  • 대표전화 0337372416

소개

  • 교통정보 
    자가용이용
    원주시외버스터미널 - 우회전(서원대로) - 무실사거리 경찰서|무실로 방면으로 좌회전(무실로) - 강원감영
  • 문화재 분류사적 제439호

◇시대 및 용도 : 조선후기, 강원도를 관장하던 관아

◇내력 및 감영지 : 2002년 3월 9일 사적 제 439호로 지정되었으며 관찰사가 머물던 지방 관아로 이 제도는 고려시대의 안찰사(按察使)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나, 안찰사가 임시적인 순찰관(巡察官)의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집권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임기가 확립된 전임관으로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한 도의 장관으로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일정한 장소에 전임기구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를 감영이라 한다. 감영의 조직구성은 한 도의 행정과 군사 최고책임자인 관찰사와 함께, 관찰사를 보좌하는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파견된 정3품 경력(經歷), 종5품 도사(都事), 종5품 판관(判官) 등의 관원과 그 지역의 토착민을 임명하는 이예직(吏隸職) 등이 있었다. 감영의 소재는 경기도 돈의문(敦義門) 밖, 충청도 충주(선조 35년 공주로 옮김), 경상도 상주(선조 29년 달성으로 옮김), 전라도 전주, 황해도 해주, 강원도 원주, 함경도 함흥, 평안도 평양 등이었는데 현재 감영의 중심 건물 선화당이 남아 있는 곳은 원주의 강원감영뿐이다.

◇각 건물 양식적 특성
1) 선화당(宣化堂)
‘선화당’이란 각 도의 관찰사[監司]가 집무하는 정당(正堂)을 말하는데 고제(古制)에선 당헌(棠軒)이라고도 하였다. 이 건물은 감영 동헌(東軒)의 부속건물로써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현종대(1660~1674)에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이 중건하였다. 기단 높이는 평균 435㎜ 내외인 두벌대의 화강석 기단이고 초석은 화강석(花崗石)을 정초(定礎)하였는데, 기둥이 앉힐자리는 평탄하게 치석(治石)하고 그 옆면은 원형으로 쇠시리 몰딩하였으며 하부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는데 쇠시리 몰딩이 없는 것도 몇 개 있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4방향에 내진주(內陣柱)를 세워 모두 툇간(退間)으로 달았다. 평면의 구성은 내진주의 좌측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은 문짝이 없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우측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 방을 두었는데 지금은 장마루를 깔았고, 내부 중간에는 미서기문을 달아 2개실로 쓸 수도 있게 하였다. 특히 마루방은 전․후․좌․우면 4면에 모두 띠살문을 달았다. 양식은 이익공(二翼工)집으로 초익공(初翼工)의 외부는 연화초각(蓮花草刻)이 있는 앙설형(仰舌形)이고, 이익공부(二翼工部)는 연봉(蓮峰)이 있고 수설형(垂舌形)으로 되었다. 내부는 운궁형(雲宮形)의 보아지 형상으로 초각(草刻)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단층집으로 중후한 느낌을 갖는 건축물이다.

2) 포정루(布政樓)
이 문루(門樓)는 선화당의 정문인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으로, 양식은 초익공(初翼工)집이다. 1660년(조선 현종 원년)에 건립되었는데, 6・25전쟁 중 일부 파손된 것을 보수한 것이다. 기둥은 각형석주(角形石柱)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중앙의 2기둥은 출입문을 달기 위해 낮은 방형초석(方形礎石)위에 세웠다.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의 2기둥은 1층까지만 있는 층단주(層斷柱)로써 더욱 넓은 2층 바닥을 구성하고, 그 주위에는 계자란천(鷄子欗千)을 돌렸다. 양식은 초익공(初翼工)집이고,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서 조식(彫飾) 이 적은 아담한 문루이다. 이 문루는 원래 포정루(布政樓)였으나 1896년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이전하고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이곳으로 입주하여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현판을 떼고 ‘운주헌(運籌軒)’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포정루라는 현판을 떼고, ‘선위루(宣威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1907년 진위대가 해산하고, 1910년 일제의 침략이후 운주헌(運籌軒)이나 선위루(宣威樓)의 현판은 없어졌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문루에 현판이 없으므로 원주인 민환기(閔桓基)씨가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라는 현판을 제작하여 달았다. 그러나 이것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였으므로 1991년 원명대로 ‘포정루(布政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위치 및 주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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