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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가 있는 오래된 마을 소초면 마을 주민 인터뷰
글쓴이 원주 기록관 (admin) 작성일 2022-11-18 17:03:10 조회수 197

역사와 문화가 있는 오래된 마을

소초면 마을 주민 인터뷰

김종필(노인회장), 윤금순(주민자치위원장),
김인수(교학리 이장), 권태학(장양2리 이장), 박효상(소초면장) 님
 




Q1. 소초면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바 소(), 풀 초(). 소초의 이름은 풀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에요. 예전에 원주가 원성군 시절 소초에서 보리, 밀 등의 작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어요.
치악산이 막아주고 있어 풍수해가 거의 없어서 밀이나 보리 수확량이 최고 많았다고 해요. 또 인구도 제일 많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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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읍면 중에서 행정 1순위였는데 문막에 인구가 많아져서 읍이 되고 지정면도 커지면서 이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소초면의 지리적 특성이 산이 많잖아요. 오죽하면 풀 초()자를 이름에 쓰겠어요. 여기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이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발전이 더디죠.

 





(사진 / 김종필 노인회장)

Q2. 소초면에서는 주로 어떤 농작물로 농사지으셨나요?


복숭아와 배가 있고 논농사, 고구마, 옥수수도 있지만, 들깨를 많이 해요. 다른 작물은 멧돼지 때문에 못 해요. 콩도 새들이 파먹고요.
멧돼지가 치악산 국립공원에서 놀다가 2~30마리가 구름처럼 내려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데 다시 국립공원 들어가면 못 잡는 거예요.
어정쩡한 산악마을이라서 산에서 나오는 주변 작물이 많지도 않고요. 둔내 같은 곳은 고랭지가 되는데 여긴 고랭지 채소가 안 돼요.
차라리 따뜻한 동네 같으면 그런 작물을 심으면 되는데 그것도 못 심고 애매한 곳이죠. 혹시 천수답(天水畓)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천수답은 교항리 쪽에 많은데, 비가 와야지 모를 심을 수 있는 논이에요.
소초면에는 큰 내천이 없으니까 비가 와야지만 논에 뭐를 심을 수 있어서 하늘만 쳐다보는 거죠그러다 장마철이 오면 꽤 많이 자란 모를 가져다가 심는 거예요.
소초면 전체가 다 천수답이라고 할 정도죠문막 같은 곳은 섬강이 옆에 있어 물을 끌고 오기가 좋은데 소초는 강이 없고 골짜기잖아요.
산이 많아서 관정을 개발하면 물이 잘 나와요관정 숫자가 제일 많은 곳인데 지금도 관정이 없으면 모를 심지 못하는 논이 2/3는 된다고 봐요.
옛날에는 지역마다 잠업(蠶業) 지도원이 있을 정도로 누에가 고소득 작물이었어요. 1990년대 초만 해도 잠업 지도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옛 원주여고 자리 앞에 고치실 뽑는 큰 잠사 회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하면서 잠업이 확장 되었어요.
평장리에서 장양리쪽으로 넘어가는 산이 있는데, 그곳을 누에 고개라고 해서 뽕나무도 많이 심었어요.
나무를 2m 이상 키워서 그걸 잘라서 먹이는 조상육이라는 새로운 기술도 도입했어요. 소초면 경제 발전에 엄청난 도움이 됐죠.
소초면이 잠업 특설지구로 지정될 정도로 소득이 가장 높았어요
소초면이 학구열도 높은 지역이었는데 누에 덕분에 당시 500원이던 학교 육성회비를 낼 수 있었어요.
말 한 마리에 천 원 정도 할 때거든요수입원이 많으니까 초등학교를 여기서 나오면 중학교를 시내로 다닐 수 있었죠.
잠업이 쇠퇴하면서 뽕나무를 캐고 복숭아 농사를 시작하게 됐어요그래서 복숭아 농가 면적이 가장 커요.
산이며 밭이며 복숭아를 많이 심어 놓으니까 열매가 맺히기 전에 피는 꽃들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복사꽃 축제도 열었었죠.
치악산 복숭아는 당도 분야에서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맛이 아주 좋아요.
주민분들이 작목반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노력해 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사진 / 김임수 교향리이장)​
 

Q3. 마을에 드림랜드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드림랜드가 있던 곳은 농경지고 산이었어요. 또 가까운 곳에 천년고찰 구룡사가 있잖아요.
치악산과 구룡사가 있으니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드림랜드를 만든 거예요.
당시 드림랜드에는 호랑이, 사자, 늑대 같은 큰 동물과 작은 동물들도 많았어요.
개장하고 처음 어린이날을 맞았을 때 원주 시내 성호아파트에서부터 차가 얼마나 막히던지 42번 국도가 꽉 찼어요.
거리로는 약 14.8km 정도 됐을 거예요그 정도로 성황을 이뤘었죠.
놀이시설도 국내에 흔하지 않은 짜릿한 놀이기구가 많아서 학생들도 소풍 삼아 왔어요.
주민들이 그곳에서 잡다한 일거리를 하기도 하고, 농산물을 판매하기도 해서 도움이 상당히 됐었죠. 외지인들도 장사하러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장양리, 지정면, 문막읍보다 땅값이 비쌌죠.
경영난 때문인지, 동물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는지, 드림랜드가 문을 닫으면서 지역경제도 침체 되고 땅값도 떨어졌죠.


* 드림랜드 ) 원주어메리칸드림랜드(20135~201510)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었던 종합 레저공원.

 



(사진 / 권태학 장양2리 이장)​


Q4. 소초면의 역사 속 이야기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3·1 운동이 있었잖아요. 만세운동이 입소문으로 전해져 오다 보니 소초면에서는 45일에서야 들고 일어났어요.
부채 고개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했는데 왜경이 쫓아 와 총을 쏘고 난리를 친 거죠.
당시 운동을 이끌었던 후손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고 매년 기념식도 열고 있어요.
하지만 당시에 참여하셨던 분 중 유공자로 인정이 안 된 분들도 계시고, 또 유공자와 관련된 지원이 여의치 않은 부분도 있어 애로사항이 좀 있습니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어요.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 스승인 운곡 원천석 선생을 모시기 위해 고향까지 찾아온 일화가 있어요
이 이야기를 테마 삼아 지역에 왕 발걸음행사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드림랜드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수레너미 고개라고 있어요.
태종 이방원이 수레를 타고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때 운곡 선생이 얼마나 양심적이고 꼿꼿하셨는지 전날 이방원이 원주 어디쯤 와서 잔다는 기별을 듣고 일부러 산속으로 피하셨다고 해요.
운곡 선생이 길을 가다 떠나시면서 안흥에서 내려가는 강이 있는데그 강이 영월 쪽으로 돌아 나가는 곳에서 빨래를 하고 계시던 할머니를 만나
만약 사람들이 내가 간 길을 물으면 반대로 말해 달라고 당부하셔서 결국 이방원이 운곡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거죠.
나중에 할머니는 운곡을 찾던 사람이 왕이고 자신이 왕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하천에 몸을 던져 죽게 되는데 그곳이 노구소(老軀沼)에요.

 




(사진 / 추적선생 영정)​


 

(사진 / 추영호 님)

명심보감의 저자와 관련된 곳도 소초면에 있어요. 소초면 교항리 공산 마을은 양지 추 씨 집성촌이에요.
이곳에 명심보감을 쓰신 노당 추적 선생의 사당 경현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어요.
명심보감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교과서로 쓰이고 지금까지 많은 청소년에게 읽히고 있잖아요.
서당에서 천자문 떼고 나서 바로 명심보감에 들어갔단 말이죠.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던 인물의 사당인데 비지정 문화재라는 이유로 복원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요
. 경현사가 무너지기 이틀 전, 26대 후손 추영호(86) 씨가 추적 선생의 영정을 간신히 챙겨 다행히도 훼손을 면할 수 있었어요.

 




(사진 / 윤금순 주민자치위워장)​


Q5. 마을의 크고 작은 자랑거리가 있을까요?


교항리 대동마을에 수령이 500년이 넘은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어요. 그 나무에 지금은 메꿔졌는데 큰 구멍이 있었어요.
한국전쟁 때 한국군 장교 하나가 나무에 난 구멍에다가 총을 쐈는데 그 총알이 다시 되돌아 나와서 그 장교가 맞아 죽었대요.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나무가 명물이라며 함부로 나무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보호를 시작한 게 지금까지 있는 거죠.
42번 국도가 비포장일 때, 비가 많이 오면 도로가 파이고 그랬어요. 그러면 마을에 있는 확성기를 통해 사람들을 면사무소에 모이게 하죠.
다 같이 힘을 모아서 비상용으로 모아 둔 가마니를 리어카에 싣고 한 사람은 끌고 두 사람은 밀면서 고개를 두세 개 넘어가요.
그곳에서 가마니에 흙을 퍼 담아 도로가 파인 곳에 쌓아 올려 차가 다닐 수 있도록 했어요. 한번은 강림으로 넘어가는 수레너미 고개에 불이 난 거예요.
그때도 마을 사람 모두 나서서 불을 끄러 올라갔어요. 그러면 부녀회에서는 면사무소에 비축해 둔 보리쌀을 가지고 큰 가마솥에 밥을 하고
집집마다 담가둔 장아찌 모아서 밥을 해 갖다주고 그랬어요
. 3일을 거기서 먹고 자면서 불을 끈 거예요.
온 마을 사람들이 1원 한 장 안 받고 불만도 없이 그렇게 마을을 위해서 힘을 모았어요. 나라도 힘들때다 보니 우리가 할 일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죠.


 



(사진 / 박효상 소초면장)​ 


아파트 살면서 옆집 사람 얼굴을 모르는 게 서울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요즘은 농촌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거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갈 길은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당 치성을 지내면 마을에서 조금씩 걷어서 반장 봉급을 주고 떡을 해 오잖아요.
저녁에 치성을 지내고 다 같이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요이런 마을 행사처럼 왕 발걸음행사와 같은 문화 탐방 프로그램도 많이 발굴해서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을 자연스럽게 지켜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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