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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행정 문화의 1번지 일산동 남재성 님, 정용복 님, 정현준 님
글쓴이 원주 기록관 (admin) 작성일 2022-11-21 15:49:15 조회수 176

과거 행정·문화의 1번지
일산동 마을 주민 인터뷰
남재성 님, 정용복 님, 정현준 님





Q1. 마을이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지금 강원감영 자리에 군청이 있었고 시청은 현재 두진하트리움이 들어선 곳이었어요. 명실상부 행정의 중심지였죠.
지금 두진하트리움부터 원동까지 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시내 쪽은 다박골이고 반대쪽은 동진골인데, 동진골은 같은 일산동이라도 정말 시골이었어요.
강원감영 주변이 일산동의 주 생활권이고 산을 넘어오는 동진골은 완전히 시골 동네라 대부분 하꼬방*들이었죠.
지금의 두진하트리움으로 넘어오는 길이 예전엔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어요.

택지가 개발되면서 택지에는 전기가 들어왔는데 일반 집은 전기가 없었어요. 1970년대 초 우리 중학교 다닐 때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왔어요.
원주에서 제일 먼저 공영으로 개발한 곳이 일산초등학교 기점으로 오른편이고 두 번째 개발한 지역이 지금 13통 지역이에요. 거기가 진짜 부촌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원주에서 유명한 분들이 모두 그쪽에서 살았어요. 지금도 살고 계신 분이 있어요.

택지가 개발되기 전에는 모두 우물에서 물을 퍼다 먹었어요.
원주기독병원 뒤쪽에 미도광고사가 있는데 그쪽으로 올라가다 만나는 첫 사거리 인근에 우물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가면서 마을에 공동수도가 설치됐죠. 단독주택에 수도 들어온 게 얼마 안 돼요.
당시 기독병원 뒤쪽도 복개가 안 되어서 개울이었고 단계동에 뒷내 개울이라고 있었는데, 여름이면 거기서 놀았어요.
또 풍물시장 옆 봉산동 철로 옆 낙차가 심한 보()에서 다이빙하고 놀았죠. 겨울에는 원주천을 막아서 스케이트장 만들어 놀고 그랬어요.
지금 기독병원 후문 쪽 언덕에 큰 구멍이 두 개 있었는데 마치 해골처럼 생겼다고 해서 해골산이라고 불렀어요. 거기서 원동 사는 아이들하고 싸우고 그랬어요.


*하꼬방 ) 하꼬-, (はこ), 판잣집



Q2. 인구가 늘면서 어떤 부분이 달라졌나요?

전학을 오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병원 앞쪽하고 뒤쪽 동네가 달라 동년배들이 만나서 옛날이야기 하다 보면 기억하고 있는 추억도 완전히 달라요.
그 당시에도 사는 모습이 다르니까 서로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책보 메고 다니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가죽가방 메고 다니는 애들이 있고, 도시락도 누구는 쌀밥에 장조림을 싸 오지만, 아예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애들도 있었죠.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받아먹었어요.
비슷한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았지만,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농사짓는 사과나 복숭아를 따다가 주기도 했어요.
 




택지가 개발되고 시청도 들어왔어요. 그리고 연세대 의과대학 분교가 생기면서 1980년대 초에는 상지대와 원주 간호 전문대 학생들도 모두 일산동 와서 놀았고요.
인구가 늘어나니 장사하는 사람들도 따라 들어오고, 어떤 사람들은 집에 쪽방 하나 더 만들어서 하숙을 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먹거리 골목 등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죠지금 박규래 정형외과 앞이 호떡 골목이고 거기서부터 로데오거리로 빠지는 통로가 먹자골목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원주 문화의 1번지였죠지역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들이 살고 있고, 또 문화까지 선도하는 지역적 여건이 갖춰져 있었잖아요.
시청과 군청, 의과대학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그러면서 빵집과 호떡집이 생겼고 그곳에서 단팥죽 팔고, 여름엔 빙수도 팔고, 아주 호황이었어요.
천안당풍미당이라는 가게가 쌍벽을 이뤘죠.
당시에는 지금의 박규래 정형외과 쪽에서 건너편을 가려면 원동에서 내려오는 천이 있어서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니곤 했어요. 지금은 모두 복개한 거예요.



Q3. 일산동의 옛 이름이 비단 금() 자를 써서 금정이었더라고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붙은 이름 같은데 아마 누에고치를 많이 했던 것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뽕나무도 많이 심었죠.
기독병원 뒤쪽으로 청사진 하는 광고사 하나가 조그맣게 있는데 그 자리가 누에고치 수매하던 곳이었어요. 원주에서 누에 하는 사람들 모두 그곳으로 몰려왔죠.
그리고 남부시장 옆에 큰 잠사 회사가 있었어요. 웬만한 집들은 다 누에를 키우고 수매를 해서 비단 금() 자를 쓴 금정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요.






Q4. 군인극장에 대한 기억도 많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많죠.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성웅 이순신>* 같은 영화를 보고 그랬어요. 하춘화 씨 공연도 봤고요. 말 그대로 군인극장이었어요.
단체 관람하는 계몽영화 보러 가면 군인들이 굉장히 많이 와 있어요. 군인과 일반인, 학생들이 섞여서 영화 보러 들어가고 그랬죠.
지금 보건소 있는 곳에 대동소아과가 있었고, 소아과 뒤까지 모두 군인극장 터였어요. 극장 앞은 광장이라 꽤 넓었어요.
그러니 무슨 행사를 하면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죠. 지하상가가 생기면서 더 그랬고요.
지금 큰나무교회 뒤가 공설 운동장 자리고 건너편에는 실내체육관이 있었어요. 그런 곳에 광장이 있으니까 사람이 정말 많이 모였죠.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이원세(감독). (1977). 엄마없는 하늘 아래 [영화]

* 성웅 이순신 ) 이규웅(감독). (1971). 성웅 이순신 [영화]



Q5. 원일로가 옛날 민주화 운동 시절에 집회하던 장소였다고 들었습니다.


원주기독병원 앞 도로는 우리 사회의 변혁기마다 늘 사람들이 모였던 장소에요. 당시에 아주 대단했어요.
지학순 주교님이 계실 때였는데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때 가톨릭교인들 중심으로 많이 모였어요.
또 대학교와 운동 단체들도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 것 같아요.
말씀드린 대로 지하상가 로터리는 사람이 워낙 많이 모이고 중심가여서 집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워낙 통제가 심했고요.
도망갈 때는 어쩔 수 없이 로터리에서 벗어나 기독병원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경찰들이 토끼몰이를 하기도 했는데 곧바로 의대가 있다 보니 학생들이 병원으로 숨어 들어오면 경찰들이 응급실까지 쫓아 들어오고 그랬어요.
병원에 최루탄 쏘고 아주 난리가 났었죠.


*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 1982318일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띄는 방화사건, 당시 원주교구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는 수배를 피해 찾아온 김은숙과 문부식, 김현장을 보호하여 은닉 혐의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Q6. 그 길이 문창모 거리로 선포식을 했었죠?

문창모* 선생님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릴 정도로 의료인으로서 많은 헌신을 하셨어요.
크리스마스실을 만들고 혈액은행도 만들고 많은 업적이 있는 분이셔서 여러 마음 맞는 단체와 개인들이 힘을 모아 문창모 거리 만들기를 추진했어요.
원주에서 가장 큰 장례를 치른 사람 중 한 명이 문창모 박사세요. 그만큼 크게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그런데 문창모 거리라고 선포만 해놓고 비석 하나 세운 것이 전부라 안타깝죠.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자라나는 세대들의 기억에서 사라질까 걱정이죠.
원주기독병원 안 문창모 기념관도 건물을 신축하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유지해야 할지 말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협의를 잘해서 기념관도 보존되면 좋겠어요강원감영에서부터 문창모 거리까지 연결되는 골목도 제대로 살려놓고 싶어요.


* 문창모 ) 고 야성 문창모(1907~2002) 박사는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1949년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 1959년 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전신 원주연합기독병원을 설립, 초대원장을 지냈다.1964년 학성동에 문이비인후과를 개원한 후 2002년 소천할 때까지 이른 새벽 병원 문을 열어 환자를 맞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업적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 대한민국건국포장, 대통령표창(88올림픽 기념탑 건립위원장) 등을 수상했다.









Q7. 시청이 이전하고 나서 동네가 많이 변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일단 로데오거리 쪽 먹자골목 상권이 다 망가졌다고 봐요. 시청이 있을 때는 다른 택지가 많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구도심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청이 옮겨지고 나서 한때 원주기독병원도 다른 곳으로 간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그나마 기독병원이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병원마저 떠났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병원 덕분에 여전히 유동 인구는 많은 편이에요.
직원과 학생들, 환자의 가족들 모두 합치면 최소 하루 만 명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남원주 역세권이 발전하면 또 힘들어지겠죠.
그래도 자생력을 잃지 않게끔 대비를 최대한 잘해두고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도 도심 속에 있지만, 점점 더 생활이 불편한 게 느껴져요. 우리도 그럴진대 젊은 사람들은 일산동에 자리 잡고 살 여건이 안 되는 거죠.






Q8. 일산동은 아직 재개발 소식이 없는데 혹시 꼭 지켜내고 싶은 게 있으실까요?

강원감영은 잘 돼 있고, 또 선교사의 집*100년이 넘은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걱정이 없어요.
문제는 문창모 거리를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원주기독병원에서 어떻게 정리할지 모르겠지만, 문창모 기념관이랑 거리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어딘가 개발이 되면 이득이 되는 걸 원하지, 보존할 만한 문화적 가치를 발굴할 생각은 잘 안 하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행정과 기독병원, 마을이 잘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주민들이 뜻과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 선교사의 집 )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 : 연세대학교 원주의대 위치한 이 건물은 의료선교를 하러온 미국인 의사 모리스(1869~1927)의 사택으로 1918년 건축되었다. 일산동 언덕 일대에 세워졌던 많은 서구식 건축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5년부터 기독병원의 역사 자료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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