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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대학생이 찾는 MT 명소 지정면 민응규 님
글쓴이 원주 기록관 (admin) 작성일 2022-11-21 16:03:12 조회수 272

수도권 대학생이 찾는 MT 명소

지정면 민응규 님







Q0. 인터뷰이 소개

민응기 님(86)1952년 무렵 이사 와 지금까지 간현리 복도’에 살고 계십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피난을 오다 원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징집이 되어 찾을 길이 막막해지자 당시 도청 소재지였던 원주로 오면 어떻게 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형님과 어머니와 함께 원주에 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복도에 있는 집을 갔습니다. 지금은 소를 키우거나 농사를 짓지 않고 있지만 인터뷰에서 이야기해 주신 공간의 모습은 그대로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 온 어르신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본 지정면 마을 이야기입니다.



Q1. 언제 원주로 오셨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때 돌아가셨어요. 선생님이었던 형님은 신체검사하고 징집이 됐는데 그때 전쟁이 났어요.
옛날에는 홍천이나 춘천보다 여기가 굉장히 후방이었지요형님이 여기 어디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옛날에는 도청이 원주에 있었어요그러니까 형님이 피난을 오더라도 봉급을 받으려면 원주에 올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해서 온 거지요.
군대 가기 전 지금 학생들로 이야기하자면 대학교 갈 만한 나이였을 것 같아.
처음에는 피난살이를 문막에서 했어요. 
고향집은 폭격을 맞았거든요.
미국에서 구호양곡이라고 하는 가루우유나 옥수수 가루 주면 죽 쑤어 먹고 지내다 서울과 교통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가족들이 결심해서 여기로 이사 왔지.



Q2.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난 대학을 못 가고 학교를 어렵게 다녔어요. 전쟁통에 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이후에 나이가 들어서 학교를 다시 다녔지만, 그것도 생활 환경이 어려워 제대로 졸업을 못 했어.
도저히 생활 여건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 그래도 계속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해군에 갔어요.
밥은 군대에서 주니까 야간 대학이라도 나오겠다고 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냥 꼼짝 없이 군대생활만 하다가 왔어.
그러다 나중에 대전 농민학교에 가게 된 거지요대전 농민학교에 목장이 있어서 낙농을 배웠고 졸업해서 과수원도 운영하고 낙농업도 했어요.
그러다 영농자금을 대출 받으려고 농협을 드나들다 농협 직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일하게 됐지.
문막농협과 여주농협, 원주농협 그리고 지정농협으로 다니면서 낙농을 같이 했어요. 목장에서 젖소를 키웠거든요.


Q3. 농사를 짓던 곳은 어디였어요?

복도라는 곳이에요. 지금 강화 레미콘이 있는 자리죠. 158천 평 되는데 강 건너에 있어요.
대전 농민하고 협동농장을 꾸리겠다고 함께 땅을 구입을 해서 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이 서로 다 맞지는 않아서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 혼자 12천 평 땅을 사서 낙농을 시작했지요. 60마리 정도 키웠어요.





Q4. 당시에 마을 분들은 주로 농사를 많이 지으셨겠네요?

문막은 경작지가 넓은데 내가 이사 올 때만 해도 농경지가 그렇게 넓지 않은 곳이었지.



Q5.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요?


옛날에는 작동, 간현 2리에 면소재지가 있었어요.
중앙선이 놓여지고 간현역이 생기는 바람에 초등학교는 터가 없어서 그대로 있고, 중학교와
 면사무소는 간현 1리로 왔지요. 신 지정면으로 소재지가 변경됐어요.



Q6. 간현역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세요.

간현역이 지정 지역의 산업 본거지가 될 정도였어요. 간현역으로 사람들이 오면서 간현이 유명한 국민 관광지가 되었어요.
그때는 간현의 섬강이 맑고, 모래사장이 좋아서 인천과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이 텐트 치고 휴가를 즐겼어요.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앉을 데가 없어 난간 옆에도 매달려 오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 차표 없이 공짜로 타고 와서 개찰구 밑으로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북적북적 했어요.
그때부터 간현에 음식점이 생기고 발전이 됐죠. 
간현 모래를 시멘트 회사로 보내려고 품팔이하러 온 사람들이 이사 오면서 마을이 쭉 만들어졌어요.



Q7. 예전의 간현역 모습과 지금은 어떤가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오던 곳이었지요. 그런데 사람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 한동안 관광객이 안 왔어요. 상가들이 심각할 정도였죠.
그러다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MT 명소로 알려지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그마저 뜸 했다가 지금 관광지 개발하고 나서 다시 활성화가 된 거예요.



Q8. 전쟁 직후에 오셨을 땐 마을도 많이 황폐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처음 결혼해서 집사람이 올 때만 해도 간현역에 전기가 없었어요. 경유 등을 흔들어서 신호를 보내고 열차 기 떨어지는 것도 손으로 직접 하고 그랬지.
철로 노선 변경하는 것도 손으로 했어요. 전기가 늦게 들어왔어. 내 기억으로는 1975년쯤 들어왔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다리가 생겼지만 옛날에는 유원지가 있는 곳에서 안창리 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넜어요.



Q9. 여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집은 어디일까요?

옛날 집은 거의 다 없어지고 있는 집은 모습만 조금씩 변한 거지.



Q10. 예전에는 주로 농사일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이 생겨났네요?


예전에는 농산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자급자족하려고 농사 짓는 사람들이 많았지.
나는 낙농업을 해서 우유를 짜 팔아야 하기 때문에 문막까지 자전거로 배달을 다녀야 했어요.
당시만 해도 이곳에는 우유를 사 먹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문막까지 가야 했는데,
 장마철이 되면 물이 넘쳐 철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우유배달을 했어요.

 


Q11. 다른 작물들은 어디에 판매하셨어요?

지금 공원으로 만들어진 작은 보가 옛날에는 배로 다니던 곳이었어요
그 배를 타고 건너온 뒤 지게에 작물을 지고 간현역까지 와서 중앙시장 영남상회와 중앙상회로 보냈어요.
우리는 버스를 타고 중앙시장에 내리면 리어카 꾼이 영남상회까지 옮겨주면 운임 주고, 낙찰 받으면 돈 받아서 오고 그랬죠. 그렇게 살았어요. 



Q12. 간현에 시장이 따로 있었나요?

여기는 시장이 없어요. 그래서 잡화점들이 많이 발달한 거예요. 지금은 기업도시가 들어오면서 마트도 생기고 많이 발전했지요.





Q13. 마을에는 어떤 단체나 모임이 있나요?

 


옛날에는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그랬으니까 대동계를 해서 경조사를 챙기기도 했는데 지금은 노인회, 상가번영회, 생활개선회 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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