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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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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
활동연도 1719~1777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字)는 명서(明瑞), 호(號)는 영호(永湖)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냈고,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충청도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를 거쳐 1758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승지(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 등에 이르렀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大司諫)·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예조(禮曹)·공조참판(工曹參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영의정(領議政)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적폐(積弊)를 해소하였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홍국영(洪國榮)의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金海)로 귀양살이가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에 병사(病死)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나고 민생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은데,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갔을 때 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우리 나라 최초로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栽培法)을 아울러 보급함으로써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널리 이용되게 하였던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그가 활동하던 영·정조시대에는 실학(實學)이 활발히 움직이던 시기였고, 이러한 사회적 바램이 그로 하여금 산업적인 면에 착상하여 고구마의 유입재배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저서로는 통신사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見聞)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 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작동에 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묘비(墓碑)도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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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