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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원주소개 > 원주둘러보기 > 원주의 인물 > 독립유공자 상세보기 - 성명, 활동분야, 출생지,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상세내용, 사진, 근거자료 제공
이은찬(李殷瓚)
활동분야 항일의병
출생지 강원 원주
출생년월일 1878
사망년월일 1909.6.27
이명은 殷贊, 諺讚, 憲讚이다.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原州郡 富興寺面)에서 출생하였으며, 본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7월 24일 일제는 비밀각서를 교환하고 이어 27일에는 신문지법(新聞紙法), 29일에는 보안법(保安法) 등, 군대해산에 따라 예상되는 국민의 반발에 대처하는 악법을 공포한 뒤 8월 1일 먼저 시위연대 5개 대대를 해산시키고 이어서 지방의 진위대 8개 대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되기에 앞서 그 내막을 눈치 챈 군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군대 해산은 의병 진영의 군사적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고 의병의 국민적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부터 그해 12월까지의 격전 횟수가 323회였다고 하는 것을 봐도 군대 해산 직후 격렬했던 항전상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병항전이 격렬해지면서 각 의병진영에서는 서울 진격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겨울에 각 진영의 연합 의병이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연합 의병체로서 ‘13도 창의대’가 형성되는데 모태적 역할을 한 인물이 이은찬이었다. 이은찬은 일찍이 1907년 9월(양) 이구재(李九載·求采)와 더불어 기병하여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의 고향 원주는 진위대 해산 후 있었던 원주진위대 의병운동의 본고장이었다. 이은찬 등의 활동은 그러한 지역적인 영향하에서 고려되어져야 한다. 이들은 일부 해산병을 중심으로 의병 500명을 소모(召募)한 후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갔다.
이인영은 을미사변 후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문경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인영을 찾아가 나흘 동안 간곡히 기병할 것을 권유하고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이인영은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르게 되었다.
곧 비분에 찬 격문(檄文)을 사방에 띄워 많은 호응을 받고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의 진용과 편성명단은 다음과 같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우 선 봉 장 김병화(金炳和)
총독장(總督將) 이구채(李球采) 후 군 장 채상준(蔡相俊)
중 군 장 이은찬(李殷瓚) 운량관(運糧官) 현이보(玄履甫)
좌 군 장 방인관(方仁寬) 재 무 관 신창선(申昌先)
우 군 장 권중희(權重熙) 민춘원(閔春元)
유 격 장 김해진(金海鎭) 좌 총 독 장 김현복(金顯福)
좌 선 봉 장 정봉준(鄭鳳俊) 우 총 독 장 이귀성(李貴成)

이즈음 연천(漣川)에서 봉기한 허 위(許蔿)의 의병이 당도하여 관동창의군 편제를 발전시켜 13도 창의군으로 개편하여 전국 의병 진영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내어 서울 진격을 제의하였다.

“용병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 단결하는데 있은 즉,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를 이루어 경기로 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되어 한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진용이 편성되었다.

13도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황해진동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군 사 장 허 위(許 蔿)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교남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호서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처음에는 신돌석이었다)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

그러나 정미의병이 대중적 의병운동으로 크게 도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돌석(申乭石)·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의 부대 등 서민의병의 진영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특히 신돌석의 경우 연합 의진에 참여하였던 것을 그의 신분이 천민에 가깝다 하여 박정빈(朴正斌)으로 바꾼 것이 의병활동의 한계성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이강년과 민긍호의 부대가 서울 진격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연합 의진의 대장인 이인영이 부친 사망을 이유로 하여 가장 중요한 시기에 물러나고 허 위가 대장이 되어 진격을 감행하였지만 이미 기밀이 누설되어 동대문 밖 격전에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허 위는 1908년 2월까지 서울 근교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은찬은 자신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양근(楊根)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 위와 손을 잡고 유기적 전략을 전개하는 등 크게 위세를 떨치었으며 때로는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 의진과도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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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