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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나무"를 아시나요?
자료출처 : [기사]박경리 문학관-소개| 신문잡지 스크랩 기사 하동희 조회 20 | 09.05.09 05:21 http://cafe.daum.net/hwahongmunhak/3s9C/72 박경리 선생을 기리는 기사를, 여행기자로서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끝내 돌아와 묻힌 경남 통영과, 80년부터 2007년 당신이 돌아갈 때까지 기거했던 강원도 원주, 그리고 대하소설 『토지』의 본적지라고 할 수 있는 경남 하동을 다니며 당신의 흔적을 되밟았습니다. 지면에 다 풀어내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아 고민이었습니다. 블로그에 따로 정리할 욕심도 있었지만, 이것도 일인지라 얼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시집 한 권을 받았습니다. 고창영이란 시인의 『뿌리 끝이 아픈 느티나무』(리토피아)란 시집입니다. 이 사람을 알지요. 강원도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의 소장을 맡고 있는 분입니다. 원주에 취재를 갔을 때 뵈었는데, 그 짧은 인연 잊지 않고 시집을 보내주었습니다. 시집을 넘겨보니 박경리 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다음의 시편입니다. 속없이 착한 사람 가슴 한가운데 뭉텅 드러내 놓고도 푸르게푸르게 살아남아 괜찮다 괜찮다고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한결같은 자리에 서서 지친 이마 짚어주는 그대여 - '박경리문학공원 느티나무' 전문 이 나무를 압니다. 박경리문학공원 바로 앞에 홀로 서 있지요. ----- 위의 첫번째 사진 ----- 박경리문학공원은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에 있습니다. 당신이 1980년 서울 정릉 집을 떠나 1994년 원주시 매지리 토지문화관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기거했던 옛집이 있는 곳입니다. 단구동 일대가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겨야 했고, 원주시는 당신이 매지리 일대 토지를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던 단구동 일대 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해 1999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고창영 소장이 거기서 일을 하고 있지요. 박경리문학공원은 원래 토지문학공원이었습니다. 하나 지난해 가을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여기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수많은 추모객이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 원주로 내려왔습니다. 한데 그들이 영 헷갈렸던 겁니다. 앞서 적었듯이 원주엔, 당신과 인연이 있는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토지문학공원(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입니다. 토지문학공원은 일반인 방문객을 위한 전시 시설과 탐방 프로그램이 갖춰져 있지만, 토지문화관은 생전의 당신이 후배 작가들을 위해 집필실을 마련해 놓은 곳입니다. 지금도 거기에선 작가들이 공짜 밥 먹고 공짜 잠 자며 작품을 쓰고 있지요. 은희경, 천운영, 김선우, 윤성희, 이문재, 백가흠, 천명관 등등 많은 작가들이 토지문화관을 자주 찾아갔지요. 숱한 추모 인파가 토지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을 헷갈려 토지문화관을 찾아갔던 겁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실망했고, 토지문화관에서 집필 중인 작가들은 그들대로 피곤했던 게지요. 해서 토지문학공원 이름을 박경리문학공원이라 바꾼 것이지요. 해마다 4만여 명이던 토지문학공원 방문객이 당신이 가시고 나서 7만7500여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으니, 이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겼던 것이지요. 당신은 거기서 혼자 살았습니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서 당신은 텃밭 일구며 맹꽁이, 소쩍새 등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 이 곳은 문학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곳입니다. 바로『토지』를 완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의 당신이 마지막에 남긴 시편 '옛날의 그 집'이 바로 이 집입니다.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전문 당신의 자택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방치 혹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늘 사람이 돌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소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의 정성인 듯 싶습니다. 박경리 선생 자택 거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진달래 꽃잎이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당신의 마당에서 자란 것이지요. 거실 오른편 벽에 선생의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왜 하필 이 글귀를 골랐는지, 죽 읽어보니 알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눈에 밟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 그것들입니다…… 광목 한 필로 나는 열 벌 가량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겨울에는 광목 옷을 입지 못하지만, 어디 열 벌의 옷을 일 년 내에 다 입고 버리겠어요? 먹는 것만 해도 그래요. 나는 혼자 있기 때문에 쌀과 잡곡 한 줌씩이면 밥을 지어먹을 수가 있지요. 텃밭에는 겨울을 빼고 푸성귀가 늘 있으니, 기본적인 간장,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식사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문제는 기본적인 것만으로 생활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은 내게 상당한 용기를 주었습니다…… 내가 용기를 얻었다는 것은 굽히고 살지 않아도 된다. 바로 그 점 때문이었습니다……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아래 사진은 거실 왼편에 있는 책장입니다. 책장에 놓여 있는 원목이 보이시지요. 대추나무입니다. 마당에서 자라던 것인데 앞서 인용한 시편에서처럼 언젠가 확 죽어버린 겁니다. 그걸 가지고 당신은 조각을 하며 소일을 했습니다. ----- 위의 두번째 사진 ----- 이제 당신의 집필실에 들어갈 차례입니다. 대문호의 생가를 방문해 보면 막상 별 게 없습니다.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집필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집필실 요란한 작가 치고 역사에 남는 대문호는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해도, 대문호의 집필실에선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떠한 기운 같은 게 온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에 빠집니다. 소박하고 단출한 살림이지만, 거기엔 분명 어떠한 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위의 세번째 사진 ----- 박경리 선생 자택의 집필실 풍경. 사진 왼편에 놓여 있는 파리채에 유독 눈길이 갔다. 집필실에서 기억에 남는 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벽에 걸린 시계. 시계바늘이 2시를 가리키며 멈춰 서 있습니다. 『토지』가 완간됐던 94년 8월 15일 새벽 2시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왼편으로 창문이 하나 나 있습니다. 이른바 '기자 창문'이라 불리던 창문입니다. 원체 인터뷰를 꺼렸던 당신은, 원주 당신의 집까지 찾아온 기자도 매몰차게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때 당신이 그 창문을 열고 버럭 성을 냈다고 하지요. "가요. 가서, 내 욕 써요."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문학 기자 시절, 2년을 조른 끝에 겨우 당신을 뵐 수 있었으니까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그때 폐암 판정을 받은 뒤였습니다. 하나 그는 제 앞에서 줄 담배를 물고 있었지요. 당신이 돌아가기 11개월쯤 전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여드리지요. 박경리문학공원에서 자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천경자 나무. 천경자라면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여기에도 물론 사연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지인이 이 나무를 당신에게 선물했답니다. 보답할 방법을 찾던 당신이, 예전에 선물을 받아 간직해오던 천경자 선생의 그림을 답례로 주었답니다. 천경자 선생의 작품이 지금 얼마에 팔리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글쎄요, 아마도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나무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싶습니다. ----- 위의 마지막 사진 ----- 다음 번엔 통영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오늘은 박경리 선생이 돌아간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4# #사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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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