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 홈 >
  •   자료실
글 보기
[원주의 문필가들 4] 치악산에 은거한 은사 운곡 원천석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01-06 17:49:46 조회수 251

원주의 문필가들 4 
 

치악산에 은거한 은사
운곡 원천석

 

 


회고가(懷古歌)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이자 원주 원 씨의 중시조이다. 1330년에 태어났으며 생몰년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운곡(김맬 운(), 골 곡())이라는 호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뜻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호이다. 고려 말의 세태에 절망한 그는 치악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했다. 이방원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태종은 즉위한 뒤 운곡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저서인 운곡시사(耘谷詩史)’을 미루어볼 때 운곡이 고려에 대한 충심으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이 스승을 만나고자 직접 원주까지 찾아오기까지 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태종이 잠시 머물렀던 절벽은 태종대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여말선초의 혼란한 시대에 유학자로서 신념을 지키며 은거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운곡 선생은 일생동안 1,144수의 시문을 남겼다. 후대의 학자들은 선생의 성품 뿐 아니라 작품의 문학적 성취 또한 높이 샀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박동량은 은거하여 벼슬 없이 지낸 사람으로 운곡 선생과 같은 분이 있어 시를 읊어 사실에 근거한 기록을 바르게 하였다. (중략) 은자로 궁색하게 초야에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을 선택한 사람들의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라는 글로 운곡 선생의 삶을 평가했다.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지만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후손이 불살라버렸다고 전해진다.

20011월에 창립된 사단법인 운곡학회가 선생의 학문 세계를 꾸준히 연구 중이며 원주시 행구동에 위치한 석경사 경내에는 선생의 충절과 고매한 성품을 기리고자 세운 시비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