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금원(金錦圓)
  • 문학도시 원주 > 작가 >  
  • 김금원

본관은 미상이며 호는 금원(錦圓)이다. 1817년에 출생하였고 사망연도는 미상이다. 원주 출신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출중하여 경사(經史)는 물론, 명가(名家)의 시문(詩文)을 두루 학습하여 시인(詩人)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했다.

1830년(순조 30) 14세의 나이로 홀로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이는 국토에 대한 애착과 견문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만폭동(萬瀑洞)·유점사(楡岾寺)의 수려한 경치를 묘사한 시가 전하고 있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직후 김덕희(金德熙)의 부실(副室)이 됨으로써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김덕희는 규장각(奎章閣) 학사(學士)를 지낸 문사(文士)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관인(官人)이기도 했다. 1845년(헌종 11) 의주부윤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갔고, 1847년 서울로 돌아와 남편의 별장인 용산(龍山) 삼호정(三湖亭)에서 기거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1850년(철종 1)에 『호동서락기(湖東西落記)』를 탈고하는 한편, 『죽서시집(竹西詩集)』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김금원의 생애에 있어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삼호정시단(三浩亭詩壇)’의 설립과 운영에 있다. 이는 남편의 지지와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동인(同人)들은 기생 출신이거나 소실들이었는데 김운초(金雲楚)·박죽서(朴竹西)등은 저마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일류시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원주가 고향인 박주서와는 친교(親交)가 가장 깊었다. 이후 김씨는 동인들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운데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김금원의 시문은 『호동서락기』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김금원의 편지를 잇달아 받아보고
  • 벗이 날 위로하려 재삼 편질 보내니,
    몇 줄 안 된 글이지만 그 뜻은 넘쳐라.
    변변치 못한 술일만정 약이 되나니,
    시든 꽃 비록 있다지만 쉬 떨어질레라.

  • 저마다들 병을 얻어 서로 찾지 못했지만,
    혼자 지내기 좋아하는게 그 어찌 인정이랴.
    여러 벗님네들 문안 받기 부끄러우니,
    속세 떠나 살자던 생각 도리어 옅어져라.

  • 박죽서(朴竹西) - 『죽서시집(竹西詩集)』



    ※ 출처: 원주시청 발행 ⌜원주의 향토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