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죽서(朴竹西)
  • 문학도시 원주 > 작가 >  
  • 박죽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죽서(竹西)·반아당(半啞堂)이다. 원주 출신이다. 죽서는 그녀의 서재(書齋) 명칭이며, 반아당은 ‘반벙어리’라는 의미의 겸칭이다. 박종언(朴宗彦)의 서녀(庶女)로서 부사(府使) 서기보(徐箕輔)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대략 1817년∼1851년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 한번은 아버지가 공부하는 서책의 내용을 모두 암송하여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성장해서는 소학(小學)·경사(經史)·고시(古詩)를 섭렵하는 한편 부덕(婦德)의 배양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천재적인 문학성을 발휘하였으며 『죽서시집(竹西詩集)』에는 10세 작품으로 전하는 오언시(五言詩)가 수록되어 있어 그 진가를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시문(詩文)은 여성 특유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님’에 대한 간절한 그림움과 여자로서의 한(恨)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녀와 교우한 대표적인 여류시인은 같은 원주 출신인 김금원(金錦圓)이었는데, 부실(副室)이라는 처지의 유사함과 아울러 문학적인 취향까지 일치되어 절친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김금원은 『죽서시집』 발문(跋文)에서 “만약 죽서와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형제가 아니면 붕우(朋友)였을 것이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박죽서는 김금원이 결성한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에 참여하여 김운초(金雲楚)·경산(瓊山)·경춘(瓊春)과 같은 여류시인과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박씨의 시문은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으로 간행되었다.


※ 출처: 원주시청 발행 ⌜원주의 향토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