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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의 상례

반곡의 상례

대동계 외에도 자연단위로 계조직을 해서 상포계를 했는데, 부모가 돌아가시면 같이 협조해서 장사를 지내고, 계원들한테 한 말씩 거두어서 1~2 가마니를 만들어 주었다.
박옥현씨에 따르면, 방묘마을에서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전체가 합심이 잘되어서 상례를 잘 지낸다고 한다. 또 회다지를 할 때면, 상주가 돈을 내어 동네 기금이 되는데, 방묘마을은 꽤 많은 기금을 모아 놓았다. 예전에 회다지는 밥이라도 먹는 집에서는 7~9회까지 했는데, 보통은 3회만 했다. 봉분 위에다 나무를 꽂고, 나무에 가랫줄을 매고 거기에 돈을 꽂았는데, 회를 다 다지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 돈을 냈다. 작은 상여는 24명 큰 상여는 35명이 맨다. 지금도 상여는 봉대마을 창고에 보관 중이다.

봉대마을

엄중화 씨의 경우, 군대에 있을 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이때 마을분들이 모두 모여 3일장을 지냈다. 김해란 씨의 경우, 40년 전 친정에서 상이 났을 때 9일장을 지냈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일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상이 난 집에서는 이 사람들을 먹여야했다. 또 상이 나면 서로 도와주는 계가 있었는데, 상포계는 상복을 만드는 베 옷감을 대준다. 시댁에 상이 나면 며느리 상복은 친정에서 해 주었는데, 이를 '거성' 이라고 하였다. 땅에 시신을 묻을 때는 ,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해서 탈관한다고 한다.

또한 상이 나면 3년 동안 밥을 해서 아침저녁으로 올렸다. 제상에 가져다 놓고 혼백을 열어 놓았다가, 나중에 혼백을 닫고 가지고 와서 식구들이 함께 먹었다. 초하루 보름으로 삭망을 올리고 곡을 하고, 삼년이 되면 기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상복은 초하루 보름까지만 입고 (즉 삭망할 때 까지만 입고) 삼년이 지나면 태워버린다.

반곡3통(뒷골)

해방 이전에는 상여나 가마는 낮은 계층 사람들이 들었지만 해방 이후로는 상이 나면 당연히 젊은이들이 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기 집안에 상이 났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각은 상여를 들지 않았다.

상이 나면 상복을 같이 만들었고, 음식으로는 돼지고기, 닭, 찌개, 부치개, 튀김음식 등을 많이 한다.

반곡3통(유만마을)

마을에 초상이 나면 소식을 듣자마자 아이들은 물론 마을사람들이 모두 왔는데, 가난한 상황에 상이 나면 먹을 것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갓집에는 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먹고 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물론 사람들도 음식을 조금씩 가져오는데 그것을 나누어 먹고 부족한 것은 초상집 주인이 보충을 했다. 또 지금은 상복을 사서 입지만, 예전에는 노인들이 모여 마름질을 해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옷을 만들고 젊은 사람들은 모여서 밥을 만들고 했다고 한다.

반곡4통(서리실마을)

천석환 씨 (1933년생)의 어머니는 84세인 1978년에 돌아가셨다. 상복은 상주가 삼베를 사가지고 오면 동네의 노인들이 만들었다. 장사집에서는 평상시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상여는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24명이 메고 나갔다. 상여를 메는 사람수는 14~15명으로 대중이 없었다. 회다지는 한 쾌, 두 쾌 올렸는데, 많이 다지는 사람은 5쾌까지 다졌다.

김영환 씨(72세)에 따르면 서리실 마을에서 상여를 메주는 사람을 상두군이라고 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메지 못했다. 서로 품앗이기 때문에, 반드시 봐주어야 했고, 부유한 상주집에서는 상여를 멜 때 고무신도 사주고 수건도 줬다고 한다. (형편이 좋지 못한 집이라도) 적어도 담배를 사주었다. 탈관을 했냐고 물었더니, 관을 쫗을 것을 쓰고 못을 쓰지 않은 관은 입관을 했고, 쇠못을 사용한 관은 탈관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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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