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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생업

농업환경

마을과 경작지

봉대마을 경작지는 봉대저수지의 둑을 높이고 공간을 넓히면서 논과 밭의 비율이 7:3 정도에 이르렀는데, 봉대저수지의 물은 수로를 이용하여 마장골에서 끌고 왔다. 마장골에는 그 골물을 이용하기 위한 더 큰 저수지를 두었는데, 몇 년 전부터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다. 저수지는 마을 사람들이나 지주들이 돈을 모아서 주변 땅을 사기 때문에, 지금도 봉대저수지는 마을 주민들의 재산이다.

방묘에서는 도랑물을 이용하거나 빗물에 의존하는 천수답이 대부분이었으나, 30여 년 전부터 지하수 과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관정에 필요한 전기 시설은 1972 ~ 1973년도 경 원성군 판부면 시절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가설을 해주었는데, 당시마을 주민들이 전봇대값을 공동으로 지불하였다고 한다.

한편 배울의 농지는 전부 다 물을 메워서 만들었다. 즉, 치악산에서 내려와서 오리골 골짜기의 저지대로 흘러서 '음지배월'과 '양지배월' 을 가르며 원주천과 합류하는 '영랑천' 지류 중 배울을 메워서 논이 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취로 사업 등을 통해 개울의 물길을 돌려서 '버덩'을 만들어 논 · 밭으로 전용한다고 해도 경작지로써 생태지리적 환경에서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배울을 지나는 영랑천 위쪽 사람들이 화전(火田)을 부쳐 먹는 것과 산의 벌목과 관련되기도 했다.

즉 이 무렵 치악산 중산간지역의 골짜기에서 널리 행해져 오던 화전(火田)농업으로 인하여 여름철 장마나 집중호우가 발생하면 토사가 물과 함께 흘러내려 버덩은 물에 잠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산의 벌목이 심하여 토사(土沙)의 유실이 쉬워진 탓이기도 했다. 배울마을 역시 70년대 이후 봉대저수지를 활용하여 물을 끌어들여 논농사를 지으면서 논의 비율이 늘어났다.한편 뒷골에서도 개울가에 있어서 물이 잘 드는 논이 있는데, 이런 논을 '보뜩' 이라고 한다.

그러나 뒷골 사람들이 뒷골에 있는 논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마을 저 마을에 논을 사서 경작하기도 했다. 유만 마을 농지는 전체 약 3만평 중 논과 밭의 비율이 7:3 정도가 된다. 논은 안전답이 6할 정도되며, 천수답이 4할 정도다. 치악산의 물로 농사를 지을 만한 물이 개울에 유입되고 있어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끌어 쓸만했다고 한다.

서리실 마을은 6 · 25 전쟁과 그로 인한 군대의 주둔과 창설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농사짓는 사람은 50%가 채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군인가족이었다.

경작지이용

반곡동에서 자신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직접 경작하였던 집들은 많지 않았다. 즉, 자력으로 농사를 지어서 농지를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다만 해방 이후 진행된 농지개혁으로 일부 농민들이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소작인이 실제적인 자가농으로 삶을 꾸려가기에는 제반 여건이 충분치 않았다. 배울마을의 일부를 제외하면 반곡동은 경작지가 확연히 늘어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경작지는 자연히 밭은 논으로 전환하는 경우와 논과 밭의 소출을 높이기 위해 지하수 관정을 하거나 비료 및 벼의 품종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벼의 품종은 통일벼가 나오기 전에는 '팔달이', '신이호', '유기도',' 농백', '다마금' 등 다양하게 심었다. 이 마을에서 화학비료가 본격적으로 공급된 시기는 1970년대부터인데, 비료를 공급하는 농협이 모양새를 갖춰가면서 개선되었다.

새마을 운동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농업 증산과 관련하여 퇴비증산사업을 경쟁적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치수(治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답작

못자리

못자리는 당해의 논농사를 생각하여 그에 맞는 양의 볍씨를 준비하고 작은 '달뱅이' 논이나 큰 논 등을 이웃과 어울리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모판을 짜는 일에서 시작한다. 6·25 전쟁 후의 못자리는 새끼를 꼬아서 모판을 그어서 만들었고, 비료는 인분을 재와 섞어서 '판대기'로 밀어서 볍씨를 뿌리고 물을 대는 방식이었다. 퇴비는 가을 무렵 낙엽을 긁어다 썩혀서 이듬해 퇴비로 썼다.

논갈이

모판의 모가 자랄 무렵이 되면 이앙기로 접어드는데, 이때는 날이 가물기 일쑤여서 논에 물을 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논에 물을 대고 나면 소를 이용하여 쟁기로 논을 가는데, 두 번, 세 번 갈아엎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경운기가 나오면서 논을 가는 일이 수월해져서 경운기로 '노타리'를 친다. 논은 가을 추수가 끝나고 논바닥이 얼기 전에 미리 한 번 갈아두는 일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을에 갈아두면 겨울을 나면서 봄 논에 풀이 적어 일하기 좋았다.

보(洑) 만들기

개울을 끼고 있는 곳에서는 보(洑)를 만드는데, 4월말에서 5월초에 막는다. 경사도가 있는 곳에서 물을 막을 때는 소나무의 '우둥치'만 잘라서 '도랑물' 위에 얹어 놓고 그 소나무 우둥치 위에 돌을 놓는다. 이렇게 막은 보는 부수지 않아도 저절로 유실되는데, 나무가 물을 먹거나 혹은 돌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기 때문이다. 물을 대는 입구는 지금은 '판대기'를 대고 닫았다 열었다 하지만, 자재가 없는 시절에는 돌과 흙으로 물을 논으로 끌어올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물을 끌어들이는 구멍은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만드는데, 일기예보가 있고 홍수가 예상될 정도면 미리 그 구멍을 담당하는 사람을 선정하여 물난리로 인한 농경지 피해에 대비하였다.

모내기

보통 단오 때가 되면 모를 심었는데, '쓰레(써레)'로 한 논에 소를 이용하여 '번지'로 고르게 논바닥을 다듬어 놓으면 모내기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모를 심는 집에서는 하루 세 끼니를 대접하는데, 중간 중간 새참과 막걸리를 내온다. 모를 심는 방식은 줄모가 관행이었는데, 줄모로 모를 심을 때는 한번 줄을 치면 두 줄 심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여벌로 한 줄을 더 심을 수 있는데, 그것을 '두 줄 떼기'라고 한다. 문제는 정상적으로 5월 단오 무렵에 모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마냥(晩秧)'이라는 뜻은 '언제 심어도 젤 끝' 혹은 늦어도 음력으로 6월 중순까지는 심어야 하는데, '시기를 넘겨서 심는 것'을 일컫기도 했다. 그래서 반곡 사람들은 "적기는 단오, 하지 전에 심으면 중모, 하지 후에 심으면 만앙"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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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