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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생애담

선친이 유성기를 가지고 장사한 이야기

  • 문 : 고향이 오디세요?
    • 답: 본 고향은 제천 봉양. 봉양 신리. 그 전에는 봉양면 신리야. 신리가 됐는데.
  • 문 : 그럼, 양평은요?
    • 답 : 양평은. 인제 아버지가 거기 있다가. 황둔이라는 데로 가셨어. 거기 새 장이 있었어. 거기 왜정 때 장이 있었어요. 신림서 원주서. 당나귀에다 싣고, 비단 싣고 이래고. 장을 볼 때. 새 장이 있었어요. 그래 장 된다고. 아버지가 글로 가서 장을 보고. 옛날에 유성기. 축음기 말이야. 그게 들어왔어. 그래가지고 인제 거기서 농사를 지으셨어. 황둔서 농사를 짓는 농토가 있었어요.

      논도 있고, 산도 하나 있고, 그래 아버지가 짓다가. 거기 기술자로 초청을 해가지고 황둔에서 만주로 가셨어. 그래 인제. 그런데. 그 전에는 내가 낳기 전에는 아버지가 백운에 있었어. 백운.나는 신동에서 태어났는데 . 아버지가 백운에서 사시다가 신동으로 오셨지. 그때 나는 안 태어났단 말이야. 그 때 우리아버지가 사십이 넘어서 나를 낳았고, 독자이니까. 내가 종손인데, 내가 없으면 문을 닫잖아. 나를 나을려고(낳으려고)정성을 많이 들였지. 그래 샘을 하나 파서 용왕을 모셨어. 그래 태어났다고 그래. 우리 아버지가 삼십 대에 유성기를 가지고, 아까 유성기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예전에는 차가 없잖아. 그래 인제 아버지는 자전차를 타고 다니셨어.

      그걸 타고 백운서 신림까지 넘어 다니고 그러셨대요. 봉양 넘어 다니고. 신림을 가려면 봉양으로 해서 가야 돼. 유성기를 가지고. 시방(지금)으로 말하면 장사. 시골에 가 유성기를 놓으면, 그게 뭐 목앙지(모가지)를 끊어서 넣는가? 이럴 적에. 옛날양산도, 노랫가락, 청춘가 이런 걸. 기가 맥히지 . 동네마다 다니면서 짐꾼은 유성기를 지고 넘어가잖아. 거기다 포목 같은 거를 가져가는 거야. 갖다 놓고 팔면 많이 파셨대. 아버지가. 약장사 하듯이. 양말이고 뭐고 가져 가면은 그 잘 산대. 한 곡조 그 소리 들으려고, 아버지가 그렇게 사셨어. 남 유달리 사셨어.

      자전거 못타 는데 자전거 타셨지. 나를 거기 와 가지고 나를 낳아가지고 또 새 장이라는데. 새 장을 따라서, 거기 장이 새로 생겼대. 새로 지금은 지어서 그런데 옛날에 쌍갈래 길이 있었어. 옛날에 장사 잘 되었다고. 제천장 하고, 원주장을 보고. 당나귀에 싣고 다니면서. 나도 알아. 장사가 잘 되었어요. 여기 장사 때문에 거길 간 거지. 시골에 가서 아버지가 팥, 콩 뭐, 쌀은 귀해 거기는. 메물(메밀) 뭐 이런 거 뫄 가지고. 이 칸. 이 칸.이런 거 두 칸짜리에다 가뜩 쌓아 놓은 거 내가 봤어요. '태기꾼'들이 지어 다하고, '도루쿠'를 해서, 실어서 서울 갔다가 팔아서 알아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다니시다가 만주로 가게 되었지. 지휘자로. 대장이지 뭐.
  • 문 : 만주 가서 몇 년 계셨어요?
    • 답 : 만주 가셔서 삼 년. 삼 년 지나서 거다 농사 져 놓고. 땅이 좋으니까. 그리로 갈려고, 다 팔았어요. 먹는 숟가락 하고, 책상하고 다 팔았어. 괘종시계라 고 요만한 거 그거 하나 놔두고, 나 공부한다고 책상 하나 놔두고. 뭐. 임시 먹을 거만 놔뒀어. 아버지 사춘을 데리고 갔거든. 이사 갈려고 준비를 했는데. 거기서 놀음을 했대. 만주 놀음이 시거든. 놀음 많이 했잖아. 그러니까. 할 수 없잖아 그래 못 들어간 거야. 들어갈 때도 삼 개국 순사가 조선순사. 만주 순사일본 순사가 지키고. 이럴땐대. 그래 못 간거야.(최봉근, 남, 76세)

미륵암을 다니게 된 사연

  • 문 : 언제 결혼하셨어요?
    • 답 : 스물일곱에 시집을 와서, 스물여덟에 우리 첫 딸을 낳은 거야.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쌍둥이를 낳았어요. 여자 쌍둥이. 그러니까 이 집은 딸부자고, 아들이 귀한 집이야. 우리 아저씨 하나예요. 여기 우리 시누들은 여덟이야. 거기 우리 영감 하나야 아들이 그런데다가 나도 딸을 낳고, 쌍둥이 딸 낳고 , 그 다음에 또 딸 나았어. 그래 난리난 거 아니야. 쫓겨갈 판이지. 그랬는데. 그 다음에. 지금 같으면 더 이상 낳지 않지. 그 다음에 낳은 게 우리 태희 야. 큰아들. 서른다섯에 낳았어요. 그다음에 그거를 나으니까. 집에 아주 꽃이 피웠잖아요. 그럴 때는 이미 우리 시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시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손자를 못 보신거야. 그래고 인제 그 다음에 계속 인제 아이가 안 생기는 거예요. 그래 아버지가 독자라.너도 독자간 보다 그러고 있는데 . 사십에 가서 또 하나를 낳았어요. 근데 또 아들이야. 그래같고 형제가 된 거야.
  • 문 : 미륵암에는 어떻게 가시게 된 거에요?
    • 답 : 예전에 우리 시할머니 적에 선몽을 받고 저 경찰서 뒤에 가면 미륵암이라고 있어요. 그 미륵님한테 다녀요. 우리는. 우리가 미륵님 자손이예요. 우리 시할머니가 꿈에. 이렇게 꿈을 꾸니까. 그. 거기에 어디를 가면은 이러이러한 미륵부 처가 있는데, 거기가서 공을 드려라. 이런 꿈을 꾸셨대. 근데 딱 거기를 찾아가니까. 아주 그 꿈 꾼대로 고대로 더래요. 그럴 때는 거기에 집도 하나도 없고 참나무밭이드래. 참나무밭 속에 참. 그. 미륵님이 이 만큼은 다 모래에 묻혀서 계시드래요. 고 위에 가면. 뭐. 샘이 있고. 다 꿈에 그대로 있더래. 숯을, 옛날에는 그 '주루먹'이라는 게 있어. 지금은 그런게 없지. 가느다랗게 꽈 갖고, 지금 뭐 배낭처럼. 그런게 있어요. 거기다가 숯, 숯 놓고. 또 새옹이라는 게 있어요. 새옹이라고 하는게 있는데. 그 새옹이라는게 이 뚜껑에다 쌀을 소복하게 하면은 밥도 소복하게 돼요, 그러면 거기다가 가서 숯불을 피워서 공양을 해서 올리고 하셨드래요. 그러니까는 그걸 언제 갔느냐 하면, 삼월삼짇날, 칠월칠석, 구월구일. 그래서 우리도 그럴 때는 꼭 가요. 일 년에 세 번은 꼭 가요.
  • 문 : 초파일에는 안 가시구요?
    • 답 : 옛날에는 초파일에는 안 갔지. 그런데 지금은 초파일에 가지.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미륵님을 위해 낳은 자식들이래서 그런지. 우리 식구 얼굴들이 남자들은. 다, 거의 미륵님 비슷해요. 전부다 아저씨같이 이렇게. 근데 거 미륵. 내가 제일 첫 번째 간 게. 우리 시어머니가 딱 나를 한 번 데리고 갔고 서. 와서 돌아가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한 대로 따라 하는 거지.
  • 문 : 가실 때 무엇을 가지고 가세요?
    • 답 : 지금은 뭐, 이런 데서 햅쌀이 나면은 햅쌀 가지고 가고, 여름에 같은 데는 과일. 옛날에는 밀가루 같은 거 가지고 갔잖아. 밀가루. 옛날에는 밀농사를 집에서 했거든요. 다 빻고 이랬잖아. 그걸 가지고 가면 국수를 한다던지. 빈대떡을 한다든지 했는데. 지금은 과일 사가지고가고. 초, 향은 뭐, 뭐든지 햇곡식나면 가지고 가요.(함기선, 여, 78세)

오릿골에서 학교 다닌 이야기

  • 문 : 어느 학교를 다니셨나요?
    • 답 : 난두 옛날에는 머리를 땋아 가지고, 그 내가 원주국민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빗겨서 땋아주셨지. 머리꼬리가 기다랗게. 그래고서는 인제. 해방이 되면서 원주에 해방이 되면서. 원주에 여자 중학교가 새로 생긴거예요.
  • 문 : 그게 원주여중인가요?
    • 답 : 그럼, 그게 첫 번에 중학교가 섰을 때는'신명여자중학교'였어요. 신명여자중학교. 밝을 신 아니. 새 신자에 밝을 명자. 그랬는데, 그 학교가 차츰 커지면서 원주여자중학교, 고등학교 이렇게 됐지. 그 때나 다닐 때는 중학교 3년'전수과'라고 1년 더 배우는 것이 있어. 그러니까 거기에 1회생이 야. 1회생.
  • 문 : 그리고 나서 교편생활을 어디서 하셨어요?
    • 답 : 교편생활을. 그 학교를 졸업 맡고. 인제 그 선생 되는 시험을 봐야 되잖아. 그래서 춘천 가서 시험을 봐서. 합격핸 사람은 인제 강습을 받아. 강습. 그거를 하고. 발령을 받아서 선생노릇을 했지.
  • 문 : 원주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셨나요?
    • 답 : 원주해서 했지요. 제일 첫 번에는 여 봉대초등학교. 여 여기가 가까우니까. 욜로 발령이 났지요. 오릿골이니까. 거기서 선생노릇을, 오릿골서 고개 하나 넘어서 이렇게 다니고. 인제 저 시집에서도 엄청 귀하게 컸어요. 저가. 오빠를 낳는데 죽고, 언니 낳고 나를 낳고, 내 밑으로는 남자만 나았어. 그래 우리 아버지가 엄청 귀여워했지요. 아들을 자꾸 나니까. 남자 동생 봤다고 엄청 귀여워 했구. 이렇게 키웠어요. 그래서 선생으로 다녀두. 인제 뭐 일이 있어서 학교에서 늦게 가잖아요. 그러면 그때 전주가 있나? 뭐가 있나? 호롱불에다가 '남포'라는 거 있어. 들고 다니는거. 거기다가 불을 켜 갖고, 학교까지 와서 데려가고 그랬어요.(함기선, 여, 78세)

봉대초등학교 건립시 대지를 기증한 박영훈

  • 문 : 할아버님께서 땅을 기증하셨어요?
    • 답 : 저희 할아버지가 학교 지을 때 땅을 기증해서. 봉대초등학교 아래 비석이 있어요. 박영훈이라고.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학교장을 치루고 그랬거든요. 돈이 있는 사람도 널리 어떻게 기증할 줄을 모르고 움켜쥐고만 사는 사람이. 움켜쥐고만 있어가지고. 그거를 어떻게 선심을 하고 그러면서 살아야 하는데. 안쓰잖아. 옛날에는 장돌뱅이들이 떠돌아 다녔잖아요. 그럼 할아버지 계시는 사랑방에 다 와 자. 모르는 사람도 와서 며칠 자고 가고. 그리고 예전에 각설이라고 있었어요. 각설이라고. 수 십년 거두셨을 걸. 우리 가도 보면 조리 같은 것도 팔다가 자고 가고 그랬어. 할아버지 혼자 계시니까. 각설이는 한 이십 년 잤지. 그래도 돌아가신 거는 딴 동네 가서 돌아가셨어. 그이가 여기서 부지런해. 은혜로다 그렇게 해 준 거야. 이제 우리 상할머니, 상할아버지만 나누도 피난을 가셨대요. 그 노인네를 누가 보살필 사람이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와서 밥해 드리고 보살폈 대. 두달을. 그러니까 우리할아버지가. 그렇게 했대.(이길선, 여, 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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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