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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방묘,배울마을

대동계

봉대마을 대동계의 역사는 구술로 회고할 수 있는 시기가 한국 전쟁 직후부터 이다. 봉대마을의 대동계는 한국 전쟁 이후 판부면 제일 부자집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밀양박씨 박연구씨 댁 사랑방을 중심으로 대동계 모임이 음력 10월 30일 날에 이루어졌다. 한정된 경작지를 한 지주가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잉여노동력이 많은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지주의 권한은 마을내부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농사 활동 뿐만 아니라 소를 임대해서 소주인과 소 키우는 사람이 이익을 나누는 방식인 '거리소'를 많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전쟁 전에 거리소를 주변 마을에 임대한 수가 '콧뚜레로 한 짐이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음력 추석 아래에 벼를 모두 찧어서 동네에 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신청하는 데로 '평두로 주고 봉두로 받았다'고 한다.

과거에 타동에서 이사 오는 사람은 쌀 한말, 술 한말을 내서 대동계에 들었고 상여나 가마, 혼인용품, 그릇과 같은 동네 물품을 쓸 수 있 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동계 활동은 중간에 없어진 적도 있었다. 시기는 대략 1960년대 미국 원조 밀가루로 저수지를 만들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980년대 초반에 다시 대동계를 만들어서 하게 되었다. 과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각 집마다 출자해서 대동계 자금을 모으되, 대출관련해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일 없이 은행에 맡 겨 놓고 관리하였다고 한다.

상포계

과거에 관혼상제 의례 중에서도 관례나 제례의 경우 마을의 상부상조 활동과는 연관이 적었던 반면에 혼례와 상례는 한 집안의 의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두의례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자연촌락 내부에서 이웃과의 인정에 따라서 상부상조를 한 경우도 있지만, 구체적인 결사체를 만들어서 상호부조를 한 경우가 대부분의 마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반곡 1통에서는 과거에 상포계가 여러 개가 조직되어서 각자 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반적으로 상포계에 가입하는 성원은 나이가 든 부모를 모시는 자식들이었다. 상포계의 재원도 쌀을 모아서 마련하였는데 대동계 쌀과 마찬가지로 모은 쌀을 장리를 놓아서 자산을 불렸다고 한다. 상례는 부모에 대한 효라는 관념이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빚을 내어서라도 자식의 의무를 다하는 중요한 행사였다.1990년대 후반 이 후에 마을에서 사자(死者)의 시신을 염하고 상여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상여를 쓰지 않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을 모시고 나중에 마을에 묘를 모실 때 상여를 태워서 지정된 장소로 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마을상례

반곡 1통의 마을 상여는 12명 메는 상여, 24명이 메는 상여, 32명이 메는 상여가 있어서 각각을 소틀, 중틀, 대틀 상여라고 불렀다. 형편이 되는 집이 대틀을 썼는데 상이 나면 상주와 동네 어른이 모여서 상여를 어떤 것을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형편이 되어야 32명이 메는 대틀을 쓸 수 있다. 이렇게 상여의 규모가 다른 것은 마을에서 경제력이 있고 위세가 있는 집안에서 상이 났을 때와 가난한 집안에서 상이 났을 때 서로 상례를 치르는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에는 상이 나도 대접을 할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 상포계와 같은 활동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간소하게 상을 치러야했다.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고 반상 관계가 강하게 남아있던 곳에서는 상여를 메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하대를 받던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그 마을에서 양반으로 통하는 사람들은 상여를 메지 않는 경향이 주로 나타난다. 하지만 반곡동의 경우 한국 전쟁 이후에 이주한 주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마을에서 상여를 메는 사람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함께 메었다.

얼마나 부조를 할 것인가는 마을 내부에서 상호간 사회적 관계의 친한 정도에 따라서 비교적 명확하게 암묵적으로 규정이 되어있는 것이 었다. 각자의 인정에 따라서 부조가 이루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상포계와 유사하게 혼인계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는데 마음 맞는 마을 사 람들이 모여서 계를 만들어 운영을 하던 것이었다. 혼인계는 쌀 뿐만 아니라 술도 몇 말 태운다든지 다른 물품까지 포함해서 운영을 하였다.

기타마을의 사회활동

새마을 운동 이후에 농촌 사회에서 보이는 각 자연마을 단위의 자치 조직들인 새마을청년회, 부녀회, 노인회와 같은 단체들이 반곡 1통에도 있었지만, 현재까지 활동이 이어지는 것은 친목계 형식의 청년회와 노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노인회 정도이다. 또한 반곡동 일대에서 유명한 친목 형식의 청년회 모임인 봉우회가 1통을 중심으로 있다. 주로 청장년층 남자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반곡 1통이 고향인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향우회 성격을 지니고 있다. 친족 간의 사회 활동의 경우 반곡 1통 밀양 박씨는 수적으로 다른 성씨보다 많이 살고 있어서 함께 모여서 친목을 다진다든지 조상의 묘와 관련해서 함께 논의하기도 한다. 반곡 1통에는 공동 문화 활동의 성격을 지닌 농악대가 활동하고 있다.1970년대 이 일대 두레로 유명했던 지역이 오리현이었고, 봉대를 중심으로 두레를 하였던 사람들도 '오리골(오리현)' 사람들과 두레싸움을 펼친 적도 있다고 하였다. 현재 농업 기반의 사회 조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농악대의 경우 마을 공동 놀이 문화의 형태로 남아서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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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