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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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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를 협동조합도시, 협동조합의 메카로 부르는 이유는 21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운동의 기본정신과 활동방향을, 원주 생명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협동조합을 들여와서 운영할 때, 어떤 조합은 사회적 경제 운영방식으로 하지 않고, 시장경제 방식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가령 1960년 5월 1일 부산 대청동에서 한국 최초로 성가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한 메리 가별(Sr. Mary Gabriella Mulhelin, 1900-1993) 수녀가 1989년 4월 미주지역 제1차 한인신협 간담회에서 자신의 신협운동을 설명하면서 시장경제의 신용은 돈을 뜻하지만, 협동조합운동에서의 신용은 신뢰와 상호 믿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한 것은, 형태는 협동조합이지만, 실제 운영은 시장경제로 운영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의 경고에 유념한 원주의 생명사상가와 생명운동가들이 원주와 강원도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하면서 가장 유의한 것도 협동조합을 협동조합답게 운영하는 것이었다.

원주 협동조합 운동의 기안자는 지학순(1921-1993)과 장일순(1928-1994)이었다.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와 평신도로 만난 두 사람이, 지역주민 복음화와 생활개선을 위해,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과 동학정신을 구현하는 운동현장으로 선택한 것이 신용협동조합운동(원주신협, 1966. 11. 13.)이었다. 신협운동을 하면서 두 사람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바티칸 공의회정신과, 전통에 기원을 둔 한국근대정신의 하나인 동학정신을 협동조합 운동정신으로 세웠다. 이것이 이후 원주가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소였다. 근대 일본은 탈아입구라고 해서 아시아적 가치와 방법을 버리고 구라파적 가치와 방법만을 택했는데, 지학순과 장일순은 아구상이라고 해서 아시아와 구라파의 가치와 방법을 서로 섞어 쓰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양자의 관계를 수직서열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교호적인 관계로 정립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신세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사상의 뿌리였다.

두 번째로 두 사람이 공유한 가장 중요한 협동조합 정신의 구현방법은 조합원간의 상호교육이었다. 이를 위해 1969년 10월 13일 진광중학교 내에 진광협동교육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1968년 원주카톨릭센터를 개관하여 1969년 1월 15일부터 4일간 제1회 ‘협동조합 강좌’를 개설하였다.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과 본인의 선택에 따라 이기적일 수도 있고, 이타적일 수도 있는데,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시장경제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탐욕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협동조합형 인간보다는 시장경제적 인간으로 생각하고 활동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협동조합형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개인과 조직이 갖고 있는 협동의 힘을 끌어낼 수 있도록 조합원 상호간에 끊임없는 상호교육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실행에 옮긴 협동조합 연구와 교육프로그램 병립운영은 향후 원주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어느 현장에서 활동하더라도 꼭 동반해야 할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이 원주가 협동조합의 메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요소였다.

세 번째로 원주가 협동조합 운동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요소는 두 사람이 공유한 협동조합 정신과 방법이 1972년 남한강 수해 피해 당시 원주 생명운동가들(이른바 원주캠프)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원주 협동조합운동의 첫 번째 역사를 만들어 보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독일 천주교 구호단체인 미세레올과 까리따스가 보내온 구호성금을 가구별로 분배하 주는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농민, 어민, 광부, 영세시민들의 광범위한 자활운동 및 협동적 공동체 건설과 직접민주주의의 체득이라는 적극적인 방법을 구사하여 원주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마을마다 협동조직을 만들어 어떤 사업을 할지 궁리하고 이사장을 뽑고 감사를 뽑아 회계를 운영함으로써 앞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려는 사람들에게 원주경험을 역사적 모델(원주 모델)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네 번째 요소로는 1단계 협동조합 정신과 운동을 도약시키는 두 번째 역사경험의 축적을 들 수 있다. 1972년 이후 남한강 주변에서 원주지역 협동조합운동의 첫 번째 역사를 마련한 원주협동조합 사상가들과 운동가들은 지역을 넘어 서울과 원주가 하나 되는 협동조합 운동모델을 만드는 역사경험을 만들어냈다. 이른바 한 살림 운동이다. 이들은 원주 농민들의 농산물을 서울 시민들의 식량으로 제공하면서 지역간 협동운동을 성취함과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협동도 추구해야 한다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제 더 이상 자연이 인간의 성공을 위한 자원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할 동반자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약탈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경험을 통해 원주의 협동운동가들의 생명사상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 글 출처: ⌜협동조합도시 원주⌟ 여는 글 발췌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www.wjcoop.or.kr/main.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