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감영 관리
강원감영 관리
-
소재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일산로 77 일원
-
종별
원주 강원감영(사적 제439호, 2002.03.09.)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제2157호, 2021.12.27.)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제3호, 1971.12.16.)
강원감영(江原監營)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강원도라는 명칭은 1395년(태조 4) 6월 13일 영동(嶺東)의 강릉도(江陵道)와 영서(嶺西)의 교주도(交州道)가 강원특별자치도로 합쳐지면서 당시 강원도의 중심 지역이었던 강릉의 ‘강(江)’자와 원주의 ‘원(原)’자를 조합한 것이다. 139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강원특별자치도 계수관(界首官) 중에서 가장 큰 지역이면서 지리적으로도 한성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계 지점이며,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한 이점을 가지고 있는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임기 1년의 관찰사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부임하여 감영에 머무르지 않고 연중의 대부분을 도내 관할구역을 순력하면서 관찰(觀察)·출척(黜陟)하는 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관찰사가 상주하며 근무하는 별도의 감영 시설물이 없었으나, 관찰사의 업무형태가 감영에 유영(留營)하면서 춘추(春秋) 2회에 걸쳐 1개월 이내로 순력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17세기 이후 각 도 감영의 관아건물들은 평안·함경감영의 기존 시설을 모방하여 점차 시설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강원감영은 웅장한 모습으로 500년 동안 강원특별자치도 역사창조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895년(고종 32) 조선8도제(朝鮮8道制)가 23부제(23府制)로 개편되면서 원주는 충주부에 소속되고 감영은 춘천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50여동의 다양한 건물로 이루어졌던 강원감영 시설물은 1895년 이후로 점차 헐려 없어지고, 1896년 이후에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본부로 사용되었으나 1907년 원주진위대가 해산되면서 그 기능도 상실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시기에 원주헌병수비대가 사용한 바 있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燒失)되었으며, 본래의 감영구역도 대체로 공기관 또는 민간에게 넘어가고 선화당(宣化堂) 및 포정루(布政樓)와 내아터로 보이는 건물이 남아있는 원주시 일산동 54-2번지 일대의 구역만이 남아 있다가 원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강원감영 복원
- 1차 복원 : 2005.08 보수(선화당, 포정루, 내아) 복원(중삼문, 내삼문, 행각) 기타(관리사, 화장실)
- 2차 복원 : 2018.11. 강원감영 후원권역 복원 완료(영주관, 봉래각, 채약오, 조오정 등)
강원감영의 의미
조선시대 다른 지역의 감영들이 여러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있었던 반면에(황해도 및 전라도 제외) 강원감영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원주에만 있었으며, 선화당과 포정루의 건물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학술 발굴조사를 토대로 강원감영의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역사적, 건축적 의미가 있다.
강원감영 내 문화유산
선화당(宣化堂)은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본관 건물로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선화당이라는 편액(扁額)의 의미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며,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농정·조세·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은 1665년(현종 6)에 이만영(李晩榮) 관찰사가 창건하기 시작하여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후임 이후산(李後山) 관찰사에 의해 31칸 규모로 축조되었다. 선화당(宣化堂)은 조선시대 고급 관아건축의 전형으로 감영 정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사례로서, 2021년 국가지정유산 보물 제2157호로 지정되었다.
포정루(布政樓)라는 편액의 의미는 지방관의 어진 정사가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1750년대에 간행된 ㆍ여지도서(輿地圖書)ㆍ‘관찰영(觀察營)’항목에 12칸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65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창건하면서 강원감영의 문루로써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선화당과 포정루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그 모습을 유지하여 왔으며 몇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