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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인물

원주소개 > 원주둘러보기 > 원주의 인물 > 향토인물 상세보기 - 성명, 활동연도, 인물소개, 파일 제공
원호
활동연도 1397~1463
조선 단종(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子)는 자허(子虛), 호(號)는 관란(觀瀾)·무항(霧巷)이다.
아버지는 별장(別將) 원헌(元憲)이며, 어머니는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여 15세를 넘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고 도학군자(道學君子)라는 칭호를 들었다. 1423년(세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학자로 인정받아 성삼문(成三問)·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여러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내고, 문종(文宗)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낙향하였고,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죽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자, 원호는 단종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 청령포 서쪽 상류인 사내평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였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죽게되어서는 백덕산(白德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원주 무항동(霧巷洞)에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침(權琛)과 함께 농민을 위해 월계도(月計圖)를 만들어 일년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쳐 볼 수 있게 하였다. 원호는 관복(官服) 입은 사람을 평생동안 대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세조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왕명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굳은 절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앉을 때와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머리를 두었으니 단종의 능(陵)이 자기 집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원주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고, 1703년(숙종 29)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82년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내남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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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1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