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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작성일 2016.11.28 조회수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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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리(法泉里)
작성자 관리자
[위치]
법천리는 부론면 소재지로서 동쪽은 손곡리, 서쪽은 경기도와 충청북도, 남쪽은 정산리, 북쪽은 흥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유래]
법천리 서원의 법천사지가 1965년 발굴 정리되었다. 당시의 유물은 불상광배, 불두,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의 석조물이다. 본존 왼쪽에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현재도 서 있는데, 이곳을 법천골이라고 옛부터 일러오고 있다.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법천사가 있었으므로 법천골이라 하였다가 법천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혁]
본래 조선시대 원주목 부론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치, 곡촌, 도시랑, 평당, 원촌, 잠치, 장평을 합병하여 법천리라 하였다.

[특이사항]
법천리에는 국보급 보물이 많이 있다. 국보급 문화재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법천사지와 조선중엽까지 존립되었던 거돈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원공국사승묘탑비, 임경업장군추모비 등 40여개소에 이르는 문화재가 있다.
한강 하류에 위치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고려와 3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지명]
▲개사리보(洑) [보]
[위치] 개치 앞에 있는 보를 말한다.

▲개치(開峙) [마을]
[위치] 법천리 남서쪽 안에 있는 부론면의 중심 마을로 법천 1리이다. 충북 충주시 앙성면으로 통하는 나루터를 배경으로 발달된 마을이다.
[내용] 현재 부론면의 행정교육경제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현재의 부론초등학교터에는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있었고 그 사이로 밀밭이 있었으며, 현재의 시장거리에는 인가가 없었다. 안말쪽과 골말 양삿쪽에만 집들이 있었고, 학교 앞 개치 나루터 언덕에 10 여호의 집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학교 서쪽 울타리 밖으로 큰 길이 나 있어 소나무 밑에서 쉬어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 남쪽 150여m 지점에 미륵불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그 자리에 신사를 짓고 미륵불은 앞산으로 옮겼으나 1990년 여름에 도난 당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래1] 예전에 중심 마을이었던 흥창이나 양삿에서 보면 동, 남, 북쪽에 높은 산악이 있었으므로 물자와 사람이 통하려면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하여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유래2] 홍수 때 개가 앉은 땅위에 마을이 있어 개치라고 한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풀이] '개'는 강이나 내에 물이 드나드는 곳, 포구를 말하며 '치'는 고개이므로 [유래1]이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개치나루 [나루]
[위치] 개치 앞에 있는 나루로 충북 충주시 앙성면으로 통한다.

▲거란족 격퇴지 [터]
[위치] 법천리에서 매골로 넘어가는 불근덕고개를 말한다.
[유래] 여기에서 고려 고종 4년(1217)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족을 크게 이겼다고 한다. 김취려 장군은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하여 박달재에서 다시 싸워 또 이겼다고 한다.

▲건너보(洑) [보]
[위치] 개치에 있는 보를 말한다.

▲건너보들 [들]
[위치] 건너보에 있는 들을 말한다.

▲고랫들 [들]
[위치] 개치 뒤에 있는 들을 말한다. 수렁논이 많다.
[풀이] 바닥이 깊숙하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이라는 뜻의 고 실에서 유래하였다.

▲고랫보 [보]
[위치] 고랫들에 딸린 보를 말한다.

▲고사리골 [골]
[위치] 서원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유래]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고사리골이라 한다.

▲고사리골 저수지 [못]
[위치] 법천 2리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곡촌(谷村) [마을] → 골말

▲골말 [마을]
[위치] 개치 동쪽 골짜기, 법천사지 남쪽의 좁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곡촌이라고도 한다.
[유래] 골짜기에 있어서 골말이라 한다.

▲광암사지(廣巖祠址) [터]
[위치] 서원말 서북쪽 능선을 넘어 민가 사이에 있다.
[유래] 정시한을 봉안하였던 곳으로 건립과 철폐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느티나무 좌측에 강당터로 보이는 초석이 있고 이곳에서 하마비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강당터에는 해방 후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달이골 [골]
[위치] 숯가마골 북동쪽으로 나 있는 골을 말한다.

▲남한강대교 [다리]
[위치] 개치 서쪽 앞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내용] 남한강을 건너 충북 충주시 앙성면으로 통하는 다리이다.

▲논저리고개 [고개]
[위치] 지르네미 북쪽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고적] → 짐대

▲대명광산 [광산]
[위치] 산수골 위에 있는 금을 캐던 광산을 말한다.

▲도동서원지(道東書院址) [터]
[위치] 법천 2리 서원말 (원촌,院村)에 있었던 서원터를 말한다.
[유래]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을 제향하던 서원터이다. 향현사(鄕顯祠) 또는 광암사(廣巖祠)로 불리웠으나 우담문집(愚潭文集)에는 1711년 2월에 광암(廣巖)에 도동사(道東祠)가 세워지고 1717년 가을에 도동서원이 완성되어 1721년 9월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제를 올렸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도동서원을 방문하고 지은 시에 "조정에서 당파싸움 일삼을 때 산림에 으뜸되는 인물이셨네. 오직 세상 영욕을 잊으시고 시종 인간의 윤리 중시하셨네. 오활(迂闊)한 선비에게 경계끼치고 경지 높아 세속의 비난 면하셨네. 내 여생 본보기 이미 있으니 뉘라서 길 어둡다 한탄만 하리오."하였다.

▲도맹실(盜孟室) [터] → 자우실골

▲도사랑(都舍郞) [마을] → 도시랭이

▲도시랑 [마을] → 도시랭이

▲도시랑이 [마을] → 도시랭이

▲도시랭이 [마을]
[위치] 법천리 동북쪽, 서원말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유래] 예전에 법천사가 창건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도하거나 학문을 닦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천 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법천사에 오는 손님들이 거처하던 사랑채가 있었다 하여 도사랑이라 하였고 이것이 변하여 도시랑이, 도시랭이로 불리고 있다.

▲도시랭이들 [들] → 장평앞들

▲도시랭이보(洑) [보]
[위치] 도시랭이 앞에 있는 보를 말한다.

▲도요지(陶窯址) [터]
[위치] 법천리 서원말 냇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도자기편과 흙덩이, 자기 받침으로 사용된 굽모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법천사가 있었던 곳이므로 사찰에서 운영하던 도자기 가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개저수지 [못]
[위치] 돌고개 밑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돌고개 [고개]
[위치] 산수골에서 정산으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뒷산 [마을]
[위치] 뒷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후산동이라고도 한다.

▲뒷산 [산]
[위치] 양삿의 뒷 쪽 산 너머 작은 골짜기를 말한다. 후산(後山)이라고도 한다.
[유래] 양삿의 뒷 쪽에 있어서 뒷산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양삿이 중심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뒷산저수지 [못]
[위치] 뒷산 앞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매곡(梅谷) [마을] → 매골

▲매골 [마을]
[위치] 도시랭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매곡이라고도 한다.
[유래1] 매화나무가 많았다 하여 매골이라 한다고 한다.
[유래2] 옛날 매를 이용하여 꿩을 잡았는데 이곳에 매를 가지고 사냥하던 사람이 살았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매골고개 [고개]
[위치] 매골 뒤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매골들 [들]
[위치] 매골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매골보(洑) [보]
[위치] 매골들에 딸린 보이다.

▲멧가마 [마을] → 왜가마

▲명봉산 [산]
[위치] 법천리 서원말 뒷산을 말한다.

▲바람골 [골]
[위치] 수영봉 북쪽, 검단이로 내려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박석고개 [고개]
[위치] 버덩말에서도 도사랑 사이에 있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유래] 이 고개에 바위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 서낭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좁은 오솔길에 서낭이 있었으나 1940년대 초에 큰 길이 났고 1990년에 포장되었다.
[특이사항] 지금은 손곡리로 통하는 큰 길이 나면서 고개가 없어졌고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버덩말 [마을]
[위치] 양삿 동쪽, 시장 입구에 자리를 하고 있다. 버렁말이라고도 한다.
[유래] 남한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진 퇴적층 위에 발달된 버덩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버덩말이라 부른다.

▲버렁말 [마을] → 버덩말

▲법천골 [마을] → 법천리

▲법천교 [다리]
[위치] 산수동과 개치를 잇는 다리를 말한다.
[내용] 길이 45m, 너비 8m로 1990년에 건립되었다.

▲법천사지(法泉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유적]
[위치] 법천리 74-2번지 법천사지 경내에 있다.
[내용] 1984년 6월 2일에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9m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천사지(法泉寺址) 석조물부재(石造物部材) [유적]
[위치] 법천리 74-2번지 법천사터 경내의 비전(碑殿)에 있다.
[특이사항] 이곳에는 석탑부재(石塔部材)·불상(佛像)·광배(光背)·배례석(拜禮石)·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용두(龍頭)·기타 조각석 등 많은 석조물이 있다.

▲법천사지(法泉寺址)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탑]
[위치]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보관되어 있다.
[유래] 본래 법천리 산 70번지 법천사터에 있었는데 1912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에 되돌아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세워졌고, 국보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법천사지(法泉寺址)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 [비]
[위치] 법천리 산 70번지 법천사터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를 말한다.
[내용] 1962년에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세웠는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유산(鄭惟産)이 글을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비문(碑文)과 음기(陰記)의 글씨를 썼다.
4.55m 높이의 이 비는 고려시대 석비로서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품으로 조각 또한 정묘하다. 귀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된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비늘을 표현했다. 등에는 네모 구획 안에 따로 귀갑문을 새겼으며 다시 그 안에 '왕'자를 양각했다. 등의 중앙에는 간결한 복련의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바깥 둘레에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며 네 귀에 전각이 뚜렷하고 귀꽃이 있다. 이수 중앙에 상륜부를 두어 보주를 얹었다.
[특이사항] 지광국사는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났는데 속명은 해린이다.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역대 왕의 우대를 받았으며 삼중대사, 승통이 된 후 문종 12년(1058)에 국사가 되었다. 동왕 21년(1067) 84세로 이곳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법천사짐대 [유적] → 짐대

▲법천사지(法泉寺址) [터]
[위치] 법천리 산 70번지에 있는 법천사터를 말한다.
[내용] → [유물 유적]

▲법천소공원 [공원]
[위치] 법천리 599번 지방도, 남한강대교 옆에 있다.

▲법천장터 [장]
[위치] 법천1리 4반에 있는 마을로 시장이 선다. 장터, 시장이라고도 한다.

▲법천천 [내]
[위치] 봉림산에서 시작하여 손곡리 지역의 여러 시냇물과 합치면서 손곡저수지, 손곡 벌말, 법천리의 서원말, 골말을 돌아 남한강에 합류하는 내를 말한다.
[내용] 기점 경계는 구만합류점이고, 종점 경계는 섬강이다.

▲벼락바우 [바위]
[위치] 법천리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유래] 벼락을 맞아 갈라진 바위여서 벼락바우라 한다..

▲보람장로교회 [교회]
[위치] 법천 1리에 있다.

▲보통골 [골]
[위치] 산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부론고등학교 [학교]
[위치] 법천리 1442번지에 있다.
[내용] 1980년에 설립인가 되어 1981년에 개교하였다. 현재 6학급에 약 240명의 학생이 있다.

▲부론교회 [교회]
[위치] 법천1리에 있는 감리교 교회를 말한다.

▲부론단위농업협동조합 [조합]
[위치] 법천리 1449-58번지에 있다.
[내용] 1969년도에 인가를 받아 설립된 이래 신용사업을 포함 조합원 영농에 필요한 각종 자금·자재 등을 공급하고 있다.

▲부론면사무소 [행정]
[위치] 법천리 1449-4, 1448번지에 있다.
[내용] 일제시대 초기에는 노림리에 있다가 3·1운동 당시에는 흥호리에 있었다. 1936년(병자년) 중부지방 대홍수로 흥호리 주민들이 가옥 및 가재도구를 유실당하고 지금의 면소재지인 법천리로 장터를 옮김에 따라 1950년 3월에 소재지 느티나무 앞인 현 부론다방위치로 이전하였다. 6.25사변으로 소실되고 수복후 법천리 1533-19번지인 홍병주 사랑채에서 면행정을 하였다. 1958년 현재의 위치로 사무소를 건축하여 옮겨 행정을 하다가 그 앞 위치에 1988년 철거된 청사를 지었고 1988년에 옛 청사를 철거하고 현대식 청사를 지었다. 1991년에 2층을 신축하였다.

▲부론보건지소 [행정]
[위치] 부론면 법천리 144번지에 있다. 1964년 10월 1일에 설치되었다.

▲부론복지회관 [회관]
[위치] 법천리 1449-70번지에 있다.
[내용] 1991년에 건립되었다. 예식장, 피로연장, 주차장 등이 있다.

▲부론선인유적비(富論先人遺蹟碑) [비]
[위치] 법천리 부론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내용] 1991년 8월 8일에 세웠다. 비석 높이는 120cm, 폭 45cm, 두께 20cm이다.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부론선인유적비(富論先人遺蹟碑)'라 쓰여져 있다.

▲부론우체국 [우체국]
[위치] 법천리 1449-31번지에 있다.
[내용] 1962년 7월 30일에 청사가 준공되어 7월 31일에 개국하였다.

▲부론중학교 [학교]
[위치] 법천리 1442번지에 있다.
[내용] 1955년에 설립 인가되어 1955년에 개교하였다. 현재 4학급에 약 130명의 학생이 있다.

▲부론초등학교 [학교]
[위치] 법천 1리 1535번지에 있다.
[내용] 1920년에 흥호리 아채에서 흥호보통공립학교로 개교하여 1934년에 단강간이학교를 부설하였다. 대홍수로 193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1940년에 노림간이학교를 부설하였다. 1949년에 손곡분교장이 부설되었다. 1985년 7개 교실이 증축되었고 현재 6학급에 약 100명의 학생이 있다.
[특이사항] 이 부근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인 뗀석기와 빗살무늬토기 조각,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조각, 초기철기시대의 두드림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부근에는 토광석개묘(土壙石蓋墓;돌널무덤)가 있고, 1973년 4 월에 2개의 석실이 발견되어 그 안에서 청자양형기(靑磁羊形器)·총동 초두·숫돌·돗자리무늬항아리·철제검 등의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불근덕고개 [고개]
[위치] 도시랑에서 매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유래] 흙빛이 붉어서 불근덕고개라 한다.

▲사당골 [골]
[위치] 매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유래] 예전에 사당이 있어서 사당골이라 한다.

▲산수골 [마을]
[위치] 골말 남쪽 건너편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산수동이라고도 한다.
[유래1] 산의 물맛이 좋다 하여 산수골 혹은 산수동이라 부른다.
[유래2] 산과 물이 맞닿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수골 앞들 [들]
[위치] 산수골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산수동(山水洞) [마을] → 산수골

▲산수동 저수지 [못]
[위치] 법천 3리 산수골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삼상동(三相洞) [골]
[위치] 법천리에 있는 골짜기로 정범조(丁範祖)의 묘소가 있다.

▲새터말 [마을]
[위치] 매골 위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서리재 [마을]
[위치] 사당골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유래] 항상 응달인 지역이어서 이 부근에서는 서리가 가장 먼저 오는 곳이라고 한다.
[풀이] '서리'는 '사이'의 옛말이다. 골과 골 사이에 있거나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을 때도 '서리'라는 이름을 쓴다.

▲서리재고개 [고개]
[위치] 서리재 서쪽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서원 [마을] → 서원말

▲서원교 [다리]
[위치] 서원말 앞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내용] 길이 25m, 너비 8m로 1997년에 가설하였다.

▲서원(書院)말 [마을]
[위치] 법천사지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원촌이라고도 한다.
[유래] 옛 법천사지에 들어선 마을인데 절이 없어진 뒤에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세종 때 문장 태재 유방선이 법천사에서 글을 가르쳤던 자리로 사후에 경현사(景顯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촌보다는 서원이라는 지명이 많이 불리고 있다. 법천사에서 글을 가르쳤던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을 사모하여 법천사 자리에다 경현사를 세우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을 제향하던 도동서원(道東書院) 터가 있었던 곳이다.

▲서원보(洑) [보]
[위치] 서원말 앞에 있는 보를 말한다.

▲소리개 [마을]
[위치] 매곡 동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수양봉 [마을] → 수영봉

▲수영봉 [마을]
[위치] 수영봉 밑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수영봉 (守英峰) [산]
[위치] 매골 마을 동북편, 수영봉 마을에 있는 높이 219m의 산을 말한다. 수양봉이라고도 한다.
[유래1] 신선들이 와서 바둑을 두고 놀았는데 지금도 바둑판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고 한다.
[유래2] 법천천 가에 절벽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산에서 수양하기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수영봉보(洑) [보]
[위치] 수영봉 앞에 있는 보를 말한다.

▲숯가마골 [골]
[위치] 장뜰 동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유래] 숯을 굽던 가마가 있어서 숯가마골이라고 한다.

▲시장 [장] → 법천장터

▲신사터 미륵 [불상]
[위치] 법천리 앞산에 있는 미륵을 말한다.
[유래] 원래 개치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신사(神社)를 짓고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신촌(新村) [마을] → 좀재

▲안말 [마을]
[위치] 개치 동쪽에 있다.
[유래] 양삿에서 볼 때 강의 상류지역으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말이라 한다.

▲앞산 [산]
[위치] 개치나루에 있는 높이는 80m의 산을 말한다.

▲양삿 [마을]
[위치] 개치 북쪽에 있다. 양호동이라고도 한다.
[내용] 옛날 이 지역에서 가장 번화하던 곳이다. 1950년 초까지만 해도 7가구가 살았던 동네였으나 6.25사변 때 모두 불타버린 이후 마을이 없어지고 논과 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남한강이 섬강과 만나는 곳에서부터 버덩말까지 산밑을 양삿이라고 말하는데 이 앞에 흐르는 남한강은 활 모양으로 되어 있어 배를 대기에 알맞게 되어 있었다. 물이 깊고 호수 같아 옛날에 서울로 왕래하던 배들이 이곳에 많이 정박해 있었고 마을에는 주막이 많았으나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 있다.

▲양호나루 [나루]
[위치] 양삿에 있던 나루를 말한다.

▲여울목 [여울]
[위치] 개치 나루 위에 있는 여울을 말한다.

▲와가마 [마을] → 왜가마

▲와부(瓦釜) [마을] → 왜가마

▲왜가마 [마을]
[위치] 개치 시장 동쪽, 버덩말에서 도시랑이 쪽으로 통하는 박석고개 좌측 지역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와부, 멧가마, 와가마라고도 한다.
[유래] 예전에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와가마>왜가마라고 부른다.

▲용마산 [산]
[위치] 법천리에 있는 산을 말한다.
[유래] 임경업장군의 조부 묘가 있는데, 이 산의 정기를 타서 임장군과 용마(龍馬)가 났다고 한다.

▲우지소 [소]
[위치] 산수골과 좀재 사이에 있는 소를 말한다.

▲우질 [마을]
[위치] 산수골과 좀재 사이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원주경찰서 부론파출소 [경찰서]
[위치] 법천리 1449-2번지에 있다.
[내용] 1945년 해방과 함께 제2관구 경찰청 제8구 경찰서 부론지서로 개칭되었고, 1949년 8월 15일에 원주경찰서 부론지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되었고, 1970년 9월 12일에 현위치에 신축되었다.
원촌(院村) [마을] → 서원말

▲이동희선생추모비(李東熙先生追慕碑) [비]
[위치] 부론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1979년 5월 5일에 건립되었다.

▲임경업(林慶業)장군 조부묘 [묘]
[위치] 법천리 매골 앞에 이중으로 되어 있는 묘를 말한다.
[유래]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게 된 지사를 살려 주고 이 자리를 얻어 쓴 후 임장군을 낳았다고 한다.

▲자우실골 [터]
[위치] 법천리에 있다. 도맹실(盜孟室)이라고도 한다.
[유래] 법천사에서 쓰던 그릇을 보관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자작고개 [고개]
[위치] 좀재 뒤로 나 있는 고개로 401번 도로가 나 있다.

▲장골 [골]
[위치] 지르네미에서 논저리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말한다.

▲장자울고개 [고개]
[위치] 지르네미 서쪽으로 있는 고개를 말한다.

▲장뜰 [마을] → 장평
[위치] 법천사지에서 동북쪽 약 500m 지점에 있는 도시랭이 개울 건너 동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장평이라고도 한다.
[유래] 예전에 법천사에서 거처하며 수도하는 사람들이 수백명 씩이나 되어 절에서 먹을 장을 담았던 장독을 놓았던 자리라 하여 장평이라고도 하나 현재 주민들은 장뜰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장뜰교 [다리]
[위치] 장뜰 앞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내용] 길이 20m, 너비 6m로 1975년에 가설하였다.

▲장터 [시장] → 법천장터

▲장평(壯坪) [마을] → 장뜰

▲장평앞들 [들]
[위치] 도시랭이와 장뜰 사이에 있는 들을 말한다. 도시랭이들이라고도 한다.

▲절터 [터] → 법천사터

▲정범조(丁範祖) 묘비 [비]
[위치] 정범조 묘소 옆에 있다.
[내용] 비석은 1867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정범조의 증손 정대식(丁大植)이 지었다. 묘비의 높이는 138cm, 폭 58cm, 두께 27cm이다.

▲정범조(丁範祖) 묘소 [묘]
[위치] 법천리 삼상동(三相洞)에 있다.
[특이사항] 정범조(1723∼1801)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정(法正), 호는 해좌(海左)이다. 묘소에는 묘비와 상석, 촛대 2기가 있다.

▲정사신(丁思愼) 묘비 [비]
[위치] 정사신 묘소 앞에 있다.
[내용] 묘비는 1833년(?)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글을 지었다. 묘비 높이는 136cm, 폭 59cm, 두께 22cm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정사신(丁思愼) 묘소 [묘]
[위치] 법천리 골말에 있다.
[특이사항] 정사신(1662∼1722)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공(聖功), 호는 기수(畸 )이다.

▲정언황(丁彦璜) 묘비 [비]
[위치] 정언황 묘소에 있다.
[내용] 묘비 비신(碑身)의 높이는 153cm, 폭 64cm, 두께 24cm이다. 비석은 1684년 7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정언황의 아들 우담 정시한이 글을 짓고 손자 정도항(丁道恒)이 글씨를 썼다.

▲정언황(丁彦璜) 묘소 [묘]
[위치] 법천리 골말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산에 있다.
[내용] 정언황(1597∼1672)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휘(仲徽), 호는 묵졸헌(默拙軒)이다. 묘소에는 상석과 문인석 2기, 촛대 2기, 묘비가 있다.

▲정터 [장] → 법천장터

▲조음(朝陰) [마을] → 좀재

▲조음재 [마을] → 좀재

▲좀재 [고개]
[위치] 산수골 남쪽에서 좀재마을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유래] 아침에 그늘이 지는 고개라는 뜻에서 한자로 부르는 이름이다. 옛날에는 좁은 오솔길이었으나 1985년에 큰 길이 나고 포장되었다.
[풀이] 원래는 고개가 좁다는 뜻에서 좁은재>조분재>조운재>존재>좀재로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재 [마을]
[위치] 법천 3리 1반으로 산수골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신촌, 조음재, 조음(朝陰)이라고도 한다.
[유래] 지씨(池氏)의 풍수가 있어서 정씨의 묘를 써 주고 이곳을 얻어서 새롭게 마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특이사항] 이 마을에서 구석기 유물인 뗀석기인 판암제 주먹도끼와 사암제 긁개가 발견되었다.

▲좀재나루 [나루]
[위치] 좀재 앞 남한강에 있는 나루를 말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짐대 [고적]
[위치] 법천사터에 있는 당간지주를 말한다.

▲탄부동 [골] → 숯가맛골

▲한들 버덩 [들]
[위치] 개치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유래]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들'은 들을 말한다. '한들'은 큰 들인데 '버덩'은 좀 언덕진 곳을 말한다.

▲한숨바우 [바위]
[위치] 남한강변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유래] 부인들이 속이 상할 때는 이 바위를 잘 찾아와 한숨을 쉰다고 한다.

▲현묘탑비 [비] →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환두골 [골]
[위치] 매골 앞에 있는 골짜기로 임경업장군 조부묘 옆이다.
[유래] 이곳에서 임장군이 환도를 얻었다고 하여 환두골이라고 한다.

▲후산(後山) [산] → 뒷산

▲후산동(後山洞) [마을] → 뒷산

[유물 유적]
[법천사지]
1982년에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는 법상종(法相宗) 사찰이었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세운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이 일찍이 이 절에서 학문을 강의하여 배우러 오는 사람이 먼 곳으로부터 모여들어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강효문의 시에 "서울에서 일찌기 서로 약속하였더니 타향에서 다시 만났네. 찬 바람은 지붕 모서리에서 울고 쌓인 눈은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급( )을 지고 배우러 오는 길은 비록 멀지만 벼슬길에 오르는 길은 멀지 않으리. 나의 서유자(徐孺子)의 호기(豪氣)가 아이들 무리에서 으뜸인 것을 사랑한다네."하였다.
유윤겸의 시에 "안탑(雁塔)에 이름 쓰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데 제군에게 붙이기에는 어질지 못한 것이 부끄럽구나. 지금에 두려워 하는 것은 비로 인하여 이끼가 올라서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져도 당년(當年)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런지."하였다.
서거정의 시에 "지난해에 글 읽던 곳. 광산(匡山)에 또 부름을 입었네. 행장은 등에 여위었는데 서적은 소 허리에 가득히 실었네. 건곤은 넓고 넓은데 도로는 멀고 멀다. 영웅이 제회(際會)와 지우(知遇)를 만나게 될 자는 필경 우리들의 무리 중에 있을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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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5.02